고현숙의 학부모코칭
고현숙의 학부모코칭 / 사춘기에는 정체성이 문제였다. 나는 왜 이 집에 태어났고, 한국에서 자라고 있는 걸까? 삶의 중요한 요소들이 사실은 우연에 의해 정해졌다는 것, 아니 나의 존재 자체가 우연이란 걸 받아들이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내가 아닌 다른 아기가 태어났더라도 부모님은 전혀 아쉽지 않았을 것이며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요컨대 우연히 주어진 삶이 나를 헤매게 한 것이었다. 1980년, 대학엘 들어갔다. 수십년간의 독재정권이 무너졌는데, 민주주의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봄이었다. 그 봄에 사람들은 독재가 다시 올까 두려워하거나 혹은 혼란이 올까 겁을 내었다. 나의 청춘은 부조리한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사람들은 부당한 현실을 참아야 하는가? 행동해서 변화시켜야 하지 않는가? 물론 나의 선택에는 희생이 따를 것이었지만, 20대의 나에게 출세를 위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안락함이란 정신적 승리에 비하면 보잘것없고 천박했다. 늘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내 인생의 질풍노도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진지한 질문들이 그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결혼, 요컨대 서로의 인생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 그래서 먼저 결혼한 선배에게 내가 한 질문은 이랬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확신이 있어야 결혼이라는 어마어마한 결정을 내릴 수 있나요?” 결혼과 더불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했다. 너는 왜 나와 다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기실 도달한 결론은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였다. 더욱 극적인 것은 내가 어머니가 된 거다. 그야말로 인생의 전혀 새로운 국면. 어머니? 어느 한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 한없이 이타적인 존재. 내가 그 몫을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최소한 윤리적인 인간이 되어야 했다.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가 되었으므로. 회사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기 시작할 무렵 내가 느낀 가장 큰 놀라움. 세상에!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내가 모르는 분야는 너무나 광활했고, 거기에 대니 나의 잣대는 작고 편협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회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곳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배워야 했다. 할 수 있는 한 많이, 되도록 빠르게, 그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상호작용으로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는 이 세계를 배워야 했다. 지적인 겸손? 물론이다.
9년 전에 코칭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못하고 있어요.” 그에게 나는 더 열심히 하라고 독려를 하거나 이런 방법을 써보라고 충고를 하는 대신, 질문을 한다. “그것이 당신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 일을 하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합니까?” 오옷,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해답을 가지고 있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질문은 지혜의 시작이라고. 우리는 요즘 스스로에게 무슨 질문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내 인생의 질문들은 무엇인가? 한국리더십센터 대표 Helen@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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