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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연출’된 것이 ‘진짜’인 세상

등록 2010-05-02 15:26수정 2010-05-02 15:39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31. 아프리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아야 할 세상의 역사
32. 이미지는 어떻게 현실을 이길까? 사진에서 배우다.
33.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 ‘부유한 노예’의 역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베냐민 지음, 최성만 옮김/도서출판 길

<찰칵, 사진의 심리학>
마르틴 슈스터 지음, 이모영 옮김/갤리온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찰칵, 사진의 심리학〉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찰칵, 사진의 심리학〉

윈스턴 처칠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진 찍기 싫다는데도 사진사가 자꾸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시가까지도 빼앗겼다. 화가 날 대로 난 순간, 사진사는 때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눌렀다. 이렇게 찍은 처칠의 사진은 ‘나치에 대한 영국의 분노’를 나타내는 사진으로 널리 퍼졌다.

히틀러의 사진사도 영리한 사람이었나 보다. 인물의 턱 쪽을 가깝게 하여 사진을 찍으면 얼굴 윤곽이 뚜렷해 보인다. 게다가 남자의 튀어나온 목젖은 강건한 인상을 준다. 여기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면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마저 풍긴다. 게다가 눈가에 비추는 강한 조명은 눈빛을 형형하게 빛나게 한다. 히틀러의 강인한 이미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어느 여성 사진작가가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히틀러를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을 본 히틀러는 고개를 가로저었단다. 도무지 자기 같지 않다고 말이다. 강인한 이미지의 사진이 ‘진짜 자기 모습’이라고 믿었던 탓이다.

사진은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느낌을 준다. 눈에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담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진은 사람들을 속여먹는 데도 널리 쓰인다. 원래 사기꾼은 순진한 인상을 하고 있는 법이다. 왜 햄버거와 탄산음료 선전은 날씬한 모델들이 할까?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이 날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광고를 의심하지 않고 햄버거와 탄산음료를 젊음과 발랄함을 나타내는 음식으로 받아들인다.

세제 광고 사진에서는 행복한 표정의 주부가 세탁기를 돌리기 마련이다. 선전하는 세제를 쓰기만 하면 고된 집안일이 행복을 주는 일로 바뀔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광고의 이미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사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라는 우리의 믿음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게다가 사진은 민주주의와 궁합이 잘 맞는다. 발터 베냐민은 사진의 특징을 그림에 견주어 설명한다. 그림을 그리는 데는 돈이 많이 든다. 반면, 사진을 찍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쉽게 복사되기에 어디에나 쉽게 내걸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돌아가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니던가. 사진은 모두에게 골고루 이미지를 내놓는다는 점에서 평등한 매체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면 결론이 산으로 가는 경우도 많다. 이른바 ‘군중심리’ 탓이다. 사람들이 흥분하여 한 방향으로 의견을 몰아갈 때 반대 의견을 펼치기는 쉽지 않다.

내가 원하는 쪽으로 사람들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싶을 때 사진은 곧잘 이용되곤 한다. 달콤한 음식을 먹으며 혀를 날름거렸다고 해보자.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은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혀를 오래 내밀고 있으면 ‘메롱’ 하며 남을 놀리는 모양새가 된다.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장면이 찍힐 때의 전후 사정은 알 리가 없다. 사진에 달린 그럴듯한 해석은 뜻하는 바대로 독자들의 판단을 휘두른다.

그렇다면 ‘이미지 조작’을 일으키는 사진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는 되레 실제보다 사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로 흘러간다. 현실은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사진은 영원히 남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사진이 잘 나오게 하는 데 더 신경 쓰곤 한다. 우리의 결혼식에서 예식 자체보다 사진 찍는 시간이 더 길어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정치인들은 사진이 멋있게 나오게 하기 위해 장면을 ‘연출’하는 일도 흔하다.

이런 분위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누구나 휴대폰 카메라로 아무 데서나 원하는 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다. 누군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면 몸이 굳기 마련이다. 카메라 렌즈도 마찬가지다. 어디서나 내 모습이 찍힐 수 있는 현실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동물들도 카메라를 겨누면 누가 자기를 바라보듯 신경을 곤두세운단다.

우리 주변에는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이들도 많다. 마뜩잖은 자신의 모습이 오래도록 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내 사진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더 불편해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진에 찍힌 이미지가 좋아 보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꽃단장하고 찍는 프로필 사진은 이제 연예인들의 몫만은 아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과연 건강한 정신을 지킬 수 있을까? 영혼이 튼튼한 사람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줄 안다. 그러나 마음이 병든 사람은 부풀려진 자기 이미지를 진짜라고 믿는다. 그래서 늘 이상에 못 미치는 자기 모습이 불만스럽기만 하다.

사진의 이미지를 실제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의 문화가 이렇지 않을까? 아무리 잘 찍은 사진이라도, 나의 실제 모습에 견주면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사진이 곧 내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화가 같은 예술가들을 나라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외쳤다.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어 사람들을 속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좇는 우리 문화는 어떨까? 우리는 뽀얗고 화사하게 ‘편집’된 얼굴과 강렬하게 꾸며진 연출 사진에 중독된 상태다.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한다 해도 가짜는 가짜일 뿐이다. 가짜를 진짜보다 더 좋아하게 된 인류 문명이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기 어려울 만큼 발전하는 이미지 편집 기술이 두렵게 다가오는 이유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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