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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되살려야할 ‘법고창신’ 정신

등록 2010-11-15 09:46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함께하는 교육] 우리말 논술 /
안광복 교사의 시사쟁점! 이 한권의 책
[난이도 수준-고2~고3]

9.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 외규장각 도서 반환, 책만 아니라 정신도 되찾아야 할 때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신병주 지음
책과함께

영조(英祖)는 스스로를 ‘서민(庶民)의 왕’으로 여겼다. 그래서 비단 대신 무명옷을 즐겨 입었단다. 그에게 청계천은 늘 골칫거리였다. 높아진 강바닥 탓에 홍수가 번번이 났기 때문이다. 피해는 번번이 계천 옆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1752년, 왕은 직접 청계천 광통교에 나갔다. 백성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다. 그 후로 영조는 오롯이 청계천에 매달렸다. 회의에서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濬川: 물이 잘 흐르도록 개천 바닥을 파냄)에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신병주 지음/책과함께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신병주 지음/책과함께

1760년, 마침내 계천 바닥을 파는 사업이 시작됐다. 57일간, 인부 21만5000명, 공사비 3만5000냥, 쌀 2300여석이 든 대공사였다. 관계자들은 영조에게 “준설 효과가 앞으로 100년은 갈 것”이라 보고했다. 흐뭇한 영조는 큰 잔치를 베풀었다.

우리는 최근 십년 사이 있었던 청계천 복원만큼이나, 250년 전의 청계천 준설을 세세하게 알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비밀은 조선시대 기록문화에 있다. 조선의 관리들은 공사의 모든 사항을 <준천사실>(濬川事實)에 담았다. 공사 장면과 축하 잔치 또한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사진자료’까지 첨부한 셈이다.

이처럼 조선의 관료들은 모든 일을 철저하게 기록했다. 다음에 일을 벌일 때 참고 자료로 삼기 위해서다. ‘의궤’(儀軌)란 이런 목적으로 만든 그림책이다. 궁궐의 결혼식, 장례식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관리들은 의궤를 만들었다. 그림에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관직(官職)과 역할을 자세하게 적었다. 의궤는 행사 전에 만들어지기도 했나 보다. 실수가 없도록 먼저 종이로 행사를 ‘시뮬레이션’해보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기록물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조선왕조실록>은 기록 문화의 대표 격이다. 실록은 숱한 자료를 참고해서 만들어졌다. <관상감일기>, <춘추관일기>, <의정부등록>, <내의원일기> 등은 관청들마다 남긴 기록들이다. 특히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의 일지는 아주 유명하다. <승정원일기>는 무려 288년간이나 매일 쓰여졌다. 날씨에서 왕의 움직임, 보고 사항, 공문에 이르기까지, 기록은 마치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을 보듯 당시를 알 수 있을 만큼 치밀하다.

기록물 관리 또한 철저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실록청 의궤>가 따라붙는다. 이는 실록 제작 과정을 담은 책이다. 여기에는 실록을 만든 모든 관리의 이름이 담겨 있다. 언제 누가 참여했고, 교체된 사람은 누구인지도 남겼다. 실록 제작에 들어간 재료도 빼곡하게 담겨 있다. 실록을 만들 때 돼지털, 개 꼬리털 등의 소소한 물건까지 얼마나 들어갔는지 적어놓았다.

<도서관리대장>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실록형지안>은 <실록>의 관리 상태를 기록한 책이다. <실록>은 3년마다 햇볕과 바람에 말렸다. 그때마다 관료들은 작업 상황을 낱낱이 적어야 했다. 책의 목록도 놓치지 않고 점검했다. 1866년, 프랑스 군인들은 강화도의 외규장각 책 창고를 덮쳤다. 책들은 사라져버렸지만, 우리는 어떤 책이 외규장각에 있었는지를 낱낱이 알고 있다. 도서 보관 상태를 기록한 <외규장각형지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선은 왜 이렇게 기록에 매달렸을까? 정조(正祖)가 세운 규장각을 보면 답이 나올 듯싶다. 정조는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불렀다. ‘온 냇가를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정조는 세상을 밝고 투명하게 만들겠다는 뜻이 강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당파싸움이 너무 심했다. 관료들은 자기 패거리의 이익에 매달렸다. 이래서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다툼을 말리려면 규칙부터 세워야 한다. 모두가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면 무작정 목소리를 높이지 못할 테다. 조선에서 기록은 ‘규칙’의 구실을 했다. 공자(孔子) 같은 성현(聖賢)들과 옛 조상들은 늘 ‘모범’이 되었다. 성현과 우러름 받는 어른들이 한 일에 어느 선비가 감히 토를 달겠는가. 기록은 당파싸움을 잠재우는 데 더없이 소중한 구실을 했다. 이 점은 조선이 세워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성현의 말씀과 역사의 가르침을 보듬는 선비들의 나라였다. 정조는 조선 본래의 모습을 뚜렷하게 했을 뿐이다.

정조는 규장각에 옛 임금의 기록들을 찾아 모았다. 이뿐만 아니라, 여러 자료들도 빼곡하게 구해다 놓았다. 책은 무려 3만여권에이르렀다. 당파가 아닌 학문으로 세상을 다스리려는 정조의 바람에서다.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에는 규장각에 있던 귀중한 자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왕의 글씨에서부터 인물 그림, 대동여지도 같은 지도와 여러 의궤들, <지봉유설> 등 조선시대판 백과사전에 이르기까지 규장각의 자료들은 풍부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선조들의 기록문화’를 무조건 감탄의 눈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기록의 나라 조선도 결국 망했다. 나라가 기울던 고종 황제 시절에도 의궤는 어김없이 만들어졌다. 사진이 있던 시절이었음에도,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을 그린 의궤와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황제 즉위식을 담은 의궤도 남아 있다.

정조는 ‘계지술사’(繼志術事)의 정신을 분명히 했다. 앞선 임금들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펼치겠다는 각오였다. 기록은 그래서 중요했다. 옛사람의 정신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우려는 마음이 없다면 기록은 그냥 종이뭉치일 뿐이다. 정조가 죽자 조선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잊어버렸다. 철저한 기록 문화도 조선을 구하지 못했던 이유다.

조선 말 규장각의 자료들은 일본·프랑스 등에 적잖이 빼앗기고 말았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기회로 이를 돌려받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눈에 보이는 자료뿐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도 되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사브리핑: 규장각 도서 반환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도서들을 약탈해갔다. 외규장각은 왕이 직접 보던 자료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만큼 자료의 가치도 높다. G20을 계기로 일본은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1205점의 자료를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프랑스와의 반환 협정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철학박사, 중동고 철학교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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