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성급한 일반화는 부적절
실마리나 흥미로운 사례로 적절
실마리나 흥미로운 사례로 적절
[김창석 기자의 서술형·논술형 대비법] 45. 자신의 경험을 쓸 때의 원칙
인간을 흔히 하나의 소우주라고 한다. 한 명, 한 명의 개별 인간이 모두 그만큼의 위대함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수사’에 가까운 말이긴 하지만, 과학적으로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 인간의 삶속에는 우주의 원리가 녹아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원소와 우주를 이루는 원소의 구성비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한 인간의 유전자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쌓아온 진화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개체의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 인간의 삶에서 인류의 역사를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이가 태어나서 걸음마를 하는 1년 안팎의 기간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은 인류가 생겨난 이래 수백만년 동안에 걸쳐 이룩한 직립보행의 간난신고를 압축적으로 감상하는 일이다.
이렇듯 개별적 인간의 삶속에는 우주와 삶의 보편적 진실이 녹아있다. 글쓰기를 할 때 자신의 경험을 쓰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삶이나 경험에서 건져내는 스토리가 다른 이에게도 의미있는 내용이 될 수만 있다면 개인의 경험은 유용한 글쓰기 재료가 된다.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점도 경험이 글쓰기 재료로 적당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만, 자신의 경험에서 보편적 진실을 끄집어내는 능력은 하루 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삶을 성찰적으로 응시하려면 다른 이의 삶에 대한 진지한 해석과 연구가 필요하다. 이는 대부분 간접 경험인 독서로 이뤄지는 만큼 책을 읽음으로써 타인의 삶을 깊이있게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한 사람일수록 이런 능력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의 경험을 글에 녹일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하나의 개인 경험을 성급하게 일반화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먼저 꼽을 수 있다. “내가 이러저러한 경험을 했을 때 이러저러한 점을 느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성급하게 판단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개인의 경험을 섣부르게 일반화하는 글을 읽을 때 읽는이는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특히 논리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는 논술을 쓸 때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논술에서 쓰이는 논리의 정합성과 설득력은 부분보다는 전체를 볼 때, 일시적인 현상보다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의 본질을 볼 때 높아진다.
예를 들어 낙태나 존엄사를 ‘생명권에 대한 인위적이고 비도덕적인 개입’의 문제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나 위엄있는 죽음을 원하는 이들의 선택권’으로 봐야 하는지를 따진다고 해보자. “내가 아는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이렇게 느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렇게 봐야 한다”고 말한다면 설득력이 높지 않을 테다. 이런 글을 쓸 때 개인의 경험은 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 정도로는 쓰일 수 있지만, 자신의 견해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논거나 논증 재료로 쓰여서는 곤란하다.
요즘 ‘경험 종결자’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듣는 이명박 대통령은 경험만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 대통령은 친서민정책을 펴면서 민생현장을 탐방할 때마다 ‘나도 젊었을 때 그거 해봤다’는 말을 남발해 새로운 유행어 수준으로 만들었다. 어떤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서민의 삶 전체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에 해당한다. “내가 경험한 일에 한해서 부분적으로 안다”고 했어야 옳다. 경험주의 환원론에 빠지면 경험한 것은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식의 논리를 펴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영역에 대해서도 간접경험과 학습을 통해 정확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이 세상을 알아나가는 방식은 직접 경험에 의해서만은 아니다. 서민의 삶을 죄다 경험했다는 대통령이 펴는 친서민정책이 박수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김창석 기자 kimcs@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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