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대화를 나눌 때 제일 피곤한 상대는 어떤 사람일까. 시쳇말로 ‘답정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중·고교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행정예고한 뒤 교육부의 행보가 전형적인 ‘답정너’에 가깝다. 예고를 했으니 의견을 들어야 하는데, 듣는 귀는 없고 통보하는 입만 있는 꼴이다.
“교육부가 자료 못 내놓겠답니다. 무도함에 끝이 없어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야당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앞서 13일 44억원의 국정 역사교과서 관련 예산을 예비비로 ‘몰래’ 처리한 교육부는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에도 예산의 세부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예비비 신청과 관련한 자료를 제출하지 않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는 게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기관들의 입장이다. 그 방침을 누가 정한 것인지 물으면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긴급한 사유에 따라 편성되는 예비비의 용처는 사후에 보고해도 된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재난·재해를 다스리기 위한 돈도 아니고 ‘정책’ 시행에 따른 돈이다.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언론에도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도 밝힐 수 없다고 한다. 국정 교과서 홍보에 사용되는 예산 내역을 밝혀달라는 국회의 요청에도 마찬가지다. 교과서 국정화 업무 담당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전화 연락도 좀처럼 닿지 않는다.
21일 교육부가 새로 문을 연 ‘올바른 역사교과서 특별 누리집’엔 국정 교과서의 도입 취지와 일정, 홍보 동영상 등의 자료가 게재돼 있다. 그러나 누리집 어디에도 의견을 청취하는 공간은 없다. 11월2일까진 행정예고 기간이니 의견 수렴에 나서야 하지만 그 또한 미적지근한 태도다. 지난 19일 행정예고 일주일을 맞아 교육부에 이의신청이 몇 건이나 접수돼 있는지를 물으니 “아직 집계를 못했다”는 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그런 교육부가 요즘 기민하게 나선 일이 있다. 교사단체들이 시국선언을 내놓겠다고 밝히자 곧바로 “징계·형사고발하겠다”고 보도자료를 냈고, 23일엔 “교육의 중립성 확보를 위한 의지를 천명하겠다”며 ‘긴급브리핑’까지 열었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도 하지 말라’는 수준이란 얘기가 나올 만하다. 이쯤 되면 전국민이 ‘답정너 대응법’ 한 가지쯤 숙지해야 할 듯하다. 참고로 인터넷엔 다음과 같은 처방전들이 나와 있다. ①못 들은 척 하기 ②빠르게 호응해주기 ③돌직구 날리기.
엄지원 기자
엄지원 기자
이슈국정교과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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