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정의당 장혜영 의원(왼쪽 첫째),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왼쪽 여섯째), 이상민 의원(왼쪽 셋째)과 공동으로 지난달 31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차별금지법·평등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 지난 14일 국회 국민동의청원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관한 청원’이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소관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차별금지법 입법 논의가 탄력을 받으면서 법 제정 반대 가짜뉴스가 번져나가고 22일엔 ‘평등에 관한 법률안 반대에 관한 청원’이 1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법사위에 회부되었다. 진보는 ‘정체성 정치’ ‘문화전쟁’을 탓하면서 중하류층의 보수화를 거론한다.
국민의힘의 새로운 대표로 이준석이 당선된 후 ‘트럼프는 왜 홍준표가 아니라 이준석에 빙의했나?’(6월12일치 <한겨레> 토요판 2면)라는 재미있는 분석이 있었다. 대체로 동의하면서 읽다가 마지막 문단에서 갸웃했다. 이 글은 트럼프와 이준석의 등장 배경으로 “진보의 정체성 정치도 한몫했는지 성찰”하기를 제안한다. “소수와 약자의 정체성에 기댄 동원 정치”가 커졌고, “정체성 문제를 두고 첨예한 문화전쟁”이 벌어져 “진보운동의 동력이 되어야 할 다수 집단의 중하류층들이 보수화”된 것이 트럼프 출현의 배경이라 정리한다.
이러한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고 매우 익숙하게 반복되어온 주장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트럼프 출현의 배경 중 하나로 유독 진보의 정체성 정치 때문에 백인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잃었다는 주장이 수년째 이어졌다. 백인 남성의 63%가 트럼프를 찍었고, 실제로는 경제적 소외보다는 인종주의의 역할이 더 컸다는 연구 결과가 이미 나왔음에도, 꾸준히 백인 노동자 계층의 소외감에 비중을 두거나 이에 설득되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운동의 동력이 되어야 할 집단인 중하류층과 인종, 젠더, 종교 등의 정체성은 무관한가. 이러한 관점은 설사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소수자와 약자의 운동을 위축시키고 ‘나중에 정치’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만든다. 그 경제적 중하류층에 바로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장애인 등이 많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예를 들어 백인 남성이 저지른 총격으로 숨진 애틀랜타 마사지 가게의 희생자들은 ‘저소득 계층’이면서 ‘아시아 여성’이라는 인종과 성별 정체성 때문에 더 쉽게 범죄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주로 정치적 수사로 언급되는 중하류층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진보가 ‘백인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잃었다고 할 때, 은근슬쩍 백인 노동자 계층의 소외가 마치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한다. 리베카 솔닛은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 “그들이 말하는 백인 노동자 계층이란 사실 백인 남성을 가리키는 암호”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중하류층’이라고 할 때, 이는 이리저리 다양한 ‘정체성’을 빼고 보편적 인간을 대표하는 남성을 가리키는 암호로 사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청년에 대한 세대 담론도 마찬가지다. 서울 몇몇 대학 출신의 남성이 소위 ‘청년 논객’으로 주목받으며 청년을 대표하는 척한다. 수없이 남성이 대표자로 나서 다양한 타자들을 배제해도 남성은 ‘정체성 정치’를 한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남성이 곧 인간이기에.
‘남성이 아닌 정체성’을 호명하면 부정적 의미를 가득 담아 ‘정체성 정치’라 부르며 덜 시급한 문제를 ‘동원’한다는 시각이야말로 얼마나 차별적인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젠더, 종교, 인종 등의 문제가 계층 혹은 계급 문제와 분리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에서 “오늘날 좌파가 계급 투쟁과 사회 문제를 잊어버렸다는 비판이 나올 때, 우리는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정확하게 말한다.
“좌파가 문화 투쟁에 연루되었고, 그 때문에 실제 계급 투쟁을 소홀히 했다는 말”은 “문화 투쟁과 계급 투쟁 사이의 엄격한 구별과 양자의 서열화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이들만이 정체성과 계급을 단순하게 구별한다.
누군가의 인권은 어떻게 ‘나중’이 될 수 있을까.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다. 현재도 몇몇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은 처벌받는다.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제도 교육에서 배제되었고, 6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백인은 흑인을 특정 장소에서 내쫓아도 괜찮았다. 이승만 정권은 일국일민주의라는 인종차별적 정책하에 수많은 ‘혼혈’ 아동들을 ‘해외입양’의 형식으로 사실상 국외로 추방했다. 인종, 성별, 종교 등 다양한 정체성에 따른 차별은 문화였고 제도였다. 정치와 여론의 주도권을 ‘보편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쥐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차별은 늘 ‘나중에’ 해결해도 괜찮은 사안이 되었다.
1215년 영국의 대헌장(Magna Carta)은 왕권을 제한하면서 자유인의 일부 권리를 보장했다.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함부로 체포되거나, 투옥되거나, 재산이 몰수되거나, 추방당하는 등의 괴롭힘을 겪지 않을 권리를 자유인에게 보장했다. 이때 자유인은 사유재산이 있는 남성이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권리장전과 존 로크, 18세기 장자크 루소 등의 철학, 그리고 미국 독립선언문과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문을 거치며 인간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개념은 점점 더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이 권리에서 여성은 ‘당연히’ 배제되었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가 많다.
18세기에 올랭프 드 구주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관습과 문화 속에서 차별을 인식하며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렇게 인권의 범주를 확장시켜왔다. 여성이 권리를 주장하고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것은 끊임없이 ‘남성 자유인’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진행되었다. 구체적 존재들이 지워진 채 막연한 ‘시민’이라는 개념은 공허하다. 이제는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날로 높아져서 동물의 권리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정체성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싸우고 연대하며 흩어진다. 각자의 정체성에 함몰되는 싸움이 아니라, 타자가 주체가 되는 투쟁을 통해 싸움의 영역을 넓힐수록 인권의 영역도 확장되었다.
정말 한국에서 ‘첨예한 문화전쟁’이 벌어져서 다수 집단의 중하류층이 보수화되었을까. 오히려 담론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혐오발화가 솔직함으로 둔갑하여 공적 영역에 쏟아져서 문제다. 문화전쟁이 아니라, 문화화된 차별 속에서 혐오 표출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마저 무시한 트랜스젠더 군인의 강제 전역, 수많은 여성이 겪는 취업 성차별 등은 모두 그 정체성 때문에 한 개인의 경제 활동이 방해받고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사건이다. 나아가 이주노동자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현실에서 우리는 전선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혐오 표현이 활개를 치는 사회에서 ‘문화전쟁’이라는 개념은 논쟁적이다. 자칫 세대론이 만들어내는 오류처럼, 세대 간에 정말 어떤 전선이 선명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세대 간에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기존의 권력에 타격을 덜 입히는 곳에 실제보다 더 강한 전선을 그어 상대적으로 다른 문제들을 흐릿하게 만든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성소수자 차별 금지 법안 통과를 촉구하며 6월을 성소수자 인권의 달로 지정했다. 권리 간의 균형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차별이 의견이었던 시절을 과거로 만들면서, 당연했던 문화를 폭력으로 인식하도록 나아가는 과정이다.
헌법 제11조에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차별에 대한 구체적인 법률로는 장애인차별금지법,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등이 있다. 그럼에도 사회의 많은 차별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지 못하며, 또 차별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직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한국에서 차별금지법은 2006년 노무현 정부 당시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무총리에게 입법 추진을 권고한 이후 2007년 처음 발의되었다. 그동안 일곱차례나 법안 제정 시도가 있었지만 꾸준히 무산되었다. 21대 국회에서 2020년 6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공적·사적 모든 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하고 예방하는 목적을 갖는다. 지난 16일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차별을 금지하는 평등법을 발의했다. 장혜영 의원의 안은 보수 개신교 등의 동성애 반대 집회 등을 차별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기에 이상민 의원 안보다 더 확장된 안이다. 또한 이상민 의원 안은 민사상 손해배상 규정은 담고 있지만 형사처벌 조항이 빠져 있다. 이러한 차이들이 보이긴 하지만 의미 있는 법안이 꾸준히 발의되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나중으로 미뤄야 할까.
차별금지법은 종교, 인종, 젠더, 학력, 국적, 결혼 여부, 가족 형태, 사상과 정치적 의견 등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보호한다. 일부에서는 차별금지법이 이슬람 국가를 만든다거나, 동성애를 조장한다거나,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무엇보다 가장 강한 반대를 불러오는 부분은 성적 지향과 정체성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이다. 2010년대부터 등장한 ‘종북 게이’라는 언어는 오늘날 혐오가 향하는 방향을 잘 드러낸다. 또한 표현의 독재자들은 혐오를 표현의 자유로, 저항을 혐오로 바꿔치기해왔다. 예를 들어 정부 예술지원사업에서 일부 여성 창작자들을 ‘페미 성향’이라 낙인찍으며 배제한 행위는 명백히 차별이다. 성차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페미니즘이라는 어떤 권력에 저항하는 존재인 듯 착각한다.
지난 14일 국회 국민동의청원에서 차별금지법 청원에 10만명 이상이 동의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더는 사회적 합의라는 말로 정치인들이 의뭉스럽게 대처할 때가 아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긍정적 신호를 보내는 척하다가 다시 시기상조라고 말을 바꿨다. 민주당이 어영부영 눈치 보며 중도 세력을 놓칠까 봐 뭉그적거리는 동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차별 속에서 하나둘 죽어갔다. 차별금지법은 시기상조가 아니다. 차별의 역사를 생각하면 언제라도 ‘너무 늦은’ 법이다.
물론 차별금지법만으로 차별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이라는 최소한의 장치조차 없다면 영원히 인권 후진국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차별금지법은 문화화된 차별을 제도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국가의 위상’이나 ‘선진국’을 좋아하는 사회인데 이참에 인권 선진국에도 도전해보면 어떨까. 정치는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오늘이 바로 과거의 ‘나중’이었다. 인권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고 차별은 의견이 아니다.
이라영 예술사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