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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돈 벌고, 결혼하고, 애 낳으니 ‘어른’이 되었습니까?

등록 2021-07-03 11:32수정 2021-07-03 11:37

[토요판]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
34. 쉰하나의 어른인 나

군대를 다녀오면 어른 된다던데
일찍 돈 벌면 일찍 어른 된다던데
결혼하고 애 낳으면 어른 된다던데

왜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고 나도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유아적일까
부끄럽지 않은 어른 되는 길 뭘까
어떤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나는 아직 적지 못한다.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 일이 올바른 길인지 뿌연 안개 같기만 하다. 사진 김비 제공
어떤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나는 아직 적지 못한다.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 일이 올바른 길인지 뿌연 안개 같기만 하다. 사진 김비 제공

‘어른’이란 말은 여전히 내 것 같지 않고 부대끼는데, 이미 나이 쉰을 넘겨버렸다. ‘어른’이란 언제나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틀렸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나는 어른 탓을 할 수 없을 만큼 먼 데까지 와 있다.

마흔 이후의 삶을 제대로 상상할 수 없었던 성소수자였기에, 나는 쉰 나이를 ‘트로피’라고 적은 기억이 있다. 트로피를 든 기분으로 환호하며 오십대의 매일을 지날 수 없다는 걸 예상했지만, 내가 과연 어른이 된 건가 어리둥절해질 때가 있다. 하나씩 고장나는 몸에 신경쓰느라 하루 중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나를 알게 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무얼 포기하고 무얼 남겨야 하는가, 어디에 내 삶이 있고 어떤 삶을 떠나보내야 하는가. 처음엔 남자로 살았고, 지금은 여자로 살고 있고, 앞으로의 나는 그 모두를 넘어선 내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중압감이 지그시 나를 누른다. 결국 늙는 일이겠지. 내 몫이 아닌 것처럼 돌아앉아 보지만 그래 봐야 도피고 합리화다. 견디는 일이든 싸워 이겨내는 일이든 남은 생은 성별에 갇힌 삶보다 더 멋지기를 바라지만, 무얼 해야 할지 확신 없긴 마찬가지다.

이 사회가 추앙하는 이성애 4인 가족의 일원이라면 자식새끼가 내 삶의 보상이고 그걸 키워냈다는 시간이 보람이라고 말할 텐데, 성소수자인 나에겐 그마저도 없다. 오십여년의 삶이 지긋지긋하도록 치열했다고 기억하는데, 어쩐지 손에 든 게 없는 모양새다.

제주 집의 낡은 두꺼비집. 사진 김비 제공
제주 집의 낡은 두꺼비집. 사진 김비 제공

고독이 성소수자한테만 있느냐

거봐라, 뭐 잘났다고 그렇게 사느냐, 억지로라도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그렇게 살아야 사람 사는 일이 아니었느냐고 통속적인 타박이 날아들겠지만, 나이 오십이 아니라 육십, 칠십이더라도 나는 그 태만하고 편협한 논리에는 발끈하게 될 것 같다.

늙어 고독을 어찌 견디겠느냐고 사람들은 성소수자를 타자화하며 묻지만, 고독이 성소수자의 늙음에만 존재할 리 없다. 아무리 겹겹이 사람들에 둘러싸인 삶이라도 외로워지고 마는 우리를 알듯이, 늙음의 풍경은 누구에게나 고독일 것이다. 차라리 애초부터 혼자만의 삶이었다면 내 한 몸 살 궁리나 할 수 있는 깨끗한 백지 위였을 텐데, 늙어서까지 자식들 고민에 찢기고 너덜너덜해져 더욱 답답해진, 그래서 더 지독한 고독이 될지 누가 알까? 혼자 있는 삶을 외롭다기보다 평화롭다고 느껴왔던 나에겐, 가질 수 없어 너무도 다행인 그런 고독 말이다.

그렇다면, 고독을 쓸까? 내 삶의 세번째 이십오년을 적기 위해 제일 처음 필요한 것이, 하필 고독일까? 나는 망설인다. 다시 또 텅 빈 백지를 바라보고만 있다. 멋진 삶은커녕, 가진 것 없어도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늙고 싶은데 그게 뭘까 요령부득이다.

스무살이 되면, 저절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마음대로 담배 연기를 하늘 위로 뿜고 술잔을 돌리면서, 어른이 된 거라고 믿었다. 불과 몇달 전까지 교실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창생들이 거리에서 담배 연기를 뿜던 풍경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이 기이하고 낯설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일일까? 똑같이 공을 차고 놀며,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스물, 스물한 살의 그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러고도 다시 또 담배를 나눠 피워물던 앳된 얼굴의 그들을 잊지 못한다. 어른이 되지 않고, 어른 흉내를 내던 우리들을.

그러면 그들은 언제 어른이 되었을까? 군대를 다녀오면 어른이 된다던데, 그러면 어른은 일사불란한 삶에 자기 자신을 끼워넣는 일일까?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마침내 무언가를 해낸 성취감을 얻는 것일까? 일찍 사회생활을 하면 일찍 어른이 된다던데, 그러면 어른이란 돈을 벌기 위해 많은 걸 무릅쓰는 일일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른이 된다던데, 왜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여러번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아도,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유아적 사고에 매몰된 삶을 살까?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어른 흉내를 내면서,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착취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 걸까? 나이만 먹어 어른일 뿐, ‘가족’이란 이름 속에서나 권력자가 되어 가장 소중한 존재여야 할 누군가를 폭력적으로 유린하며 아집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어른들.

제주 상한동 경로당 앞 노인보호구역. 사진 김비 제공
제주 상한동 경로당 앞 노인보호구역. 사진 김비 제공

성소수자로 살며 어른이 고팠다
뉘우치고 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

서른에 나는 열다섯이 되었다

어른이 되고 난 그다음에야 늙는 건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걸 꽤 자주 목격한다. 남이야 어찌 되든 말든 제 목표에만 매달려 밀어붙이는 일이 당연하다고 믿는 성인들을 만나게 되면, 품 안에 모든 장난감을 끌어안고 하나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떼쓰며 우는 철부지 앞에 선 것 같다. 누구보다 명민하고 많은 걸 배웠을 어른이, 어쩌다가 그렇게 되고 말았을까? 나이를 먹고, 무수히 많은 책을 읽고, 논리를 쌓아가는 것만으로는 어른이 되지 않는 모양이구나, 한숨이 쏟아지고 만다.

다 그러고 사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다른 사람들을 싸잡을 때면, 그동안 보여줬던 학식이나 덕망마저 내동댕이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 먹고사는 일 앞에 다 그렇지, 제 발등에 불 떨어지면 마찬가지지. 나 역시 뭐 다를 건가, 자조적으로 웅얼거리고 나면 나는 또 ‘어른’으로부터 수십년은 떠밀린 것만 같다. 어른이 뭐 별건가, 그렇게 나도 어른 되기를 포기하고 만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다는 이상향 같은 게 있었다면 좋으련만, 나에겐 그저 살아남고 싶었던 게 전부였다. 무엇으로라도 좋으니, 내 한 몸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성확정 수술을 받은 서른 이후, 나는 어른이 되었다기보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런 자유가 있었나, 이토록 자연스러운 삶이 나에게도 있었나, 나는 서른이었지만 열다섯처럼 한동안 철없이 지냈다.

춤추듯 온몸을 들썩이며 일상을 살았고,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차를 몰고 돌아다녔다. 이 나라 곳곳을 여행하겠다고 차를 몰고 전국의 시외버스터미널을 돌아다니며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모든 곳에 가고 싶었고, 사람들 속에 섞여 있고 싶었다. 사람 속에 섞여 있어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나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어른이 되어 좋은 것이 아니라, 비로소 한 인간이 되어 좋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유를 알게 되는 일일까? 나는 지구 끝까지 뜀박질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청춘을 떠올릴 때, 스물을 떠올리지 않고 수술 이후 서른을 떠올린다. 그때가 참 좋았지, 마음속으로나마 마음껏 내달리던 나를 기억한다.

그러나 그 뜨거웠던 서른의 청춘이 제대로 나이 먹고 어른이 되었는가 묻는다면, 머뭇거리게 될 것 같다. 돌아보면 나는 너무 내 안에 매몰되어 있었고, 주변을 둘러볼 줄 몰랐다. 어쩌면 징그럽도록 제 가족들에만 목을 매는 ‘이성애 4인 가족’의 집착처럼, 나 역시 내 혼란에 붙들려 어른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철부지였나 이제야 깨닫고 만다. 꼭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 되묻고 나면 그 해답 역시 명확하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옹졸함이 그릇된 ‘어른상’으로부터 기인된 것은 아닌가 의심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길을 낸 사람’으로서의 책무조차 내동댕이친 채 모든 걸 시절 탓으로만 돌리는, 최소한의 나잇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옹졸함 말이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제 흠결을 돌아보지 못한 채, 따라오지 않으니 예의없고 오만불손이라고 끌끌 혀나 차는 그 옹졸함.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화상. 김비, 디지털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화상. 김비, 디지털화.

겸손의 언어로 준엄하게 꾸짖고
이러면 안된다고 소리치는 어른이
분노·박탈감으로 무거운 짐 안은
지금 이 시대 청춘 역시 그럴지도
이 세계는 왜 당신들만의 것이냐고

정중하고 예의바른 어른은 어디에

쉰하나의 어른인 내 현실이 지금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삶의 가치를 ‘돈’으로만 헤아리는 이 시대의 방식으로 보자면, 내 삶은 여전히 보잘것없을 것이다. 맨 밑바닥에서 올라왔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나는 믿지만, 이 시대의 기준으로부터 꽤나 멀리 떨어져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나 역시 ‘앞선 사람’으로 내 책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돈 버는 법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다른 것들에 관해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모두가 쫓고 있는 단 하나의 지향점을 달리해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삶에 관해 말할 수 있을 테고, 기존의 가족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에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곁에 사는 사람과 어우러진 삶에 관해, 포용하는 시간의 풍요로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며, 불안이나 고독과 같이 살기 위해 어떤 얼굴이어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내 전략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가진 것 없고 위태로운 삶이지만, 이왕이면 좀 더 평온한 내가 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내 방식을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성소수자든 비성소수자든 삶이란 결국 살아내는 일이니, 늙음 앞에 서면 우린 비로소 많은 걸 나눌 수 있는 서로가 되지 않을까? 그것이 어른의 태도 아닐까? 눈을 열고 귀를 열어 진심을 다해 누군가의 삶 앞에 선 사람. 내 삶이 귀하니 당신의 삶도 귀하겠지, 최소한의 존중을 아는 사람.

‘꼰대’니 ‘선비질’이니 무례한 말들에 흔들리고 그걸 핑계 삼아 회피하려 하지 말고, 나는 서로 다른 세대의 어른들이, 뉘우치고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주기를 바란다. 경험한 시절이 그랬고, 보고 들은 것이 그뿐이라 이해되지 않고 답답하겠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정중하고 예의를 갖춘 겸손의 언어로 이 사회에 필요한 말들을 되돌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쉰이나 예순이 어른이라면 스물이나 서른 역시 어른의 시작이니 부끄러운 짓들을 쌓으며 어른 흉내만 내는 뻔뻔스러움을 배우지 말고, 우리가 되어야 할 어른은 어떤 모습인가, 이전과는 어떻게 달라야 할 것이고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거기에서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사회에 성소수자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면서, 아마 나는 항상 어른이란 존재가 고팠는지 모른다. 의지할 데 없고 척박했던 시절이라 더욱더 이 사회 어디엔가 ‘진짜 어른’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가족이나 친척이라서가 아니라, 동네 사람이나 우리 학교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와 같은 성별이거나 비슷한 몸의 모양을 가져서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이니까 지켜줄 수 있는 어른. 한번도 제대로 된 내 편을 가져본 적 없었을 누군가를 위해 다들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소리칠 수 있는 어른이, 어린 시절의 나는 무척이나 그리웠던 것 같다.

분노와 박탈감으로 무거운 짐을 끌어안고 있을 지금 이 시대의 청춘들도 혹시 그런 마음인 게 아닐까? 이 사회는 왜 당신들만의 세계였느냐고, 왜 책임지지 않느냐고, 왜 반성하지 않고 뻔뻔스럽기만 한 거냐고, 그토록 거창했던 신념들은 당신들 몫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느냐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도 ‘미래가 없다’ ‘이 사회가 너무도 지옥 같다’는 한 줄의 문장을 적을 수밖에 없는 스물이나 서른을, 어느새 우린 무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제 몫의 통장에서 자릿수만 세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떤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나는 아직 적지 못한다. 어떻게 나이 들어가는 일이 올바른 길인지 뿌연 안개 같기만 하다. 이미 어른이 되었든 아직 되지 않았든 한 인간으로의 책무를 잊지 않는 나이기를 바란다. 나이 먹으면 저절로 되는 게 어른이라고 게을러지거나, 나이 들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내가 먼저 물러서는 내가 되지 않기를. 어른이란 ‘됨’이 아니라 ‘배움’일까?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배우는 사람이어야겠다고, 나는 내 삶의 세번째 백지 위에 첫 글자를 적기 위해 엎드린다. 부끄러운 땀이 흐른다.

▶ 김비. 소설가. 에세이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소설 <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등이 있으며, 배구선수 ‘김연경’처럼 모두에게 든든한 언니, 누나가 되기를 희망한다. 2020년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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