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불러준 대로, 시키는 대로…‘예스맨’ 돼버린 판사들

등록 2021-08-07 09:33수정 2021-08-07 10:54

2014년 상고법원에 반기 든 변협
‘괘씸죄’ 불이익 문건 작성한 판사
‘임종헌 지시 따랐다’ 반복 증언
재판 복귀한 뒤 지시 따른 사례도
[한겨레S]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판사와 상명하복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6월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6월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그런 문구를 추가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표현은 (임종헌 전 차장이) 직접 불러준 워딩입니다.”

지난 7월28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153회 재판. 전직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의 예전 법정 증언이 증거조사를 통해 복기되고 있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이들은 정보기관 뺨치는 정보 수집과 정세 분석, 전략 수립으로 내부 문건을 만들어 보고하는 실무자였다. 청와대와의 협의를 위해 재판을 거래 대상으로 제시하거나 최고법원의 위상을 굳히기 위해 재판에 개입하는 방안 등이 과격하고 정무적인 언어로 서술됐는데, 이들은 법정에 나와 그 출처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지목했다. 문제 문건은 사법농단 행동대장 격인 임 전 차장이 알려주고, 불러주고, 채근해서 작성한 것에 불과하다는 항변이다.

“재판개입 방안, 임종헌 불러준 대로”

이날 재판은 김종복 전 판사(현 변호사)의 과거 법정 증언(2019년 10월23일) 등을 살폈다. 김 전 판사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 심의관(2013년 2월~2015년 2월)으로 일하면서 변호사 직역단체인 대한변협 압박 방안 문건 등을 작성했다. 2014년 8월 대한변협이 대법원 역점사업인 상고법원 도입에 배치되는 대법관 증원에 찬성하자 “대법원장님 체면이 손상됐다”며 그 대응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비신사적인 행태”를 보인 “대한변협의 도 넘은 행동에 대한 대가”로 대법원의 <대한변협신문> 광고 중단 등을 검토했고 일부는 실행에 옮겨졌다. 김 전 판사의 법정 증언이다.

“(임종헌 당시에는 기획조정실장이) 격앙된 반응을 보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건(방안) 다 한번 모아봐라’ 이야기했습니다. 워딩도 많이 불러주시고 ‘비신사적인 행태’라는 워딩도 임종헌 실장님이 쓰셨던 말인 것 같고요. 저것도 임 실장님 표현인데요. ‘도를 넘어섰다’는 표현을 많이 쓰십니다. (중략)

만약 (방안이) 실행된다면 정말 부적절하겠죠. 실행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거든요. (중략) 광고 중단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정도니까 피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총액이 1600만원이나 되는지는 몰랐습니다.”

다른 심의관들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임 전 차장이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며 주요 내용을 불러주면 이를 받아적어 문건으로 작성해 보고하는 ‘받아쓰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판사가 썼다고 믿기 어려운 정무적·전략적 판단도 “일어나지 않은 일, 선제적이라는 표현을 굉장히 좋아하는”(①) 임종헌 전 차장의 업무 스타일에서 기인했다고 부연했다. 정다주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현 변호사)은 대법원 조사 과정에서 이렇게 항변했다고 한다. 그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사용할 말씀 자료로 사법부의 국정운영 협력 사례를 정리하는 등 문건 다수를 작성했다.

“특정 주제에 대해 실장, 차장의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할 때 ‘논리 대 논리’로 설득하는 방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외 어떤 급한 상황에 대해 임종헌 차장님은 (성격이) 급하고 채근을 하셔서…. 논리 대 논리로 가면 부딪히고 ‘알았다, 보고서로 작성하겠다’ 하고 생각한 바를 적나라하게 써서 보고하면 쿨링 다운(cooling down·냉각)됩니다. 나이 많은 부모 싸움 말리는 상황이 됐을 때 남는 게 (그런) 보고서입니다.”(②) 아무리 보아도 이런 증언들은 낯설다. 법원행정처 심의관도 결국 판사이기 때문이다. 재판을 직접 해본 사람이 재판 업무를 돕는 것도 잘할 것이라 보고 판사들을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임명하는데 이들은 통상 2년여 일하고 재판 업무로 복귀한다. 판사는 양심에 따라 독립해서 판단하라는 뜻에서 탄핵이나 징계 등이 아니면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않는다.(헌법 제103조, 106조) 소신에 따라 부당 지시를 거부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심의관은 그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당시 관료화되고 경직된 법원행정처 분위기상 “왜 이런 지시를 하셨냐고 따지는 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①) 법원행정처에서 일할 때만큼은 판사 아닌 행정공무원이기 때문에 “상사 지시에 복종하는 게 맞다”고도 한다.(③)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20년 6월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제4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2020년 6월8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제4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직권남용 피해갈 탈출구 마련 시도

그러나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판사와 상명하복 원리에 충실한 행정공무원, 스위치를 껐다 켜듯 전환할 수 있을까. 2015년 7월 정다주 전 심의관의 국정운영 협력 사례 문건은 서울중앙지법 판사로 복귀해서 작성한 것이다. 본래 업무로 돌아온 지 5개월여가 지났는데도 법원행정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단순한 책임 떠넘기기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이런 증언들은 사법농단 피고인들이 직권남용을 피해가는 탈출구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직권남용(형법 제123조)이 성립하려면 세번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여 ㉢그 상대방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한의 행사를 방해했다는 게 입증돼야 하는데, 앞선 심의관의 진술은 ㉢을 논리적으로 빠져나간다. 심의관(하급자)은 법원행정처 간부(상급자)가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일했을 뿐 주어진 고유의 권한이나 지켜야 할 원칙, 기준이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저 상급자의 업무를 보조해 상급자의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

지난 3월 사법농단 재판 사상 1심 첫 유죄 판결(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을 내린 재판부는 이런 논리에 제동을 걸었다. 심의관에게도 법관윤리강령, 헌법을 따라야 할 고유의 권한과 의무가 주어져 있다는 거다. “재판하는 판사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시받는 것에 친해져선 안 된다”고 우려했다. 결국 판사는 판사다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난 7월15일 판사를 임용할 때 법조 경력을 10년에서 5년으로 낮춘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1소위를 통과했다. 사법연수원 수료→판사 임용→배석·단독·부장판사로 이어지는 획일적·수직적 경로 대신, 법원 밖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법조 경력자를 판사로 임용하자는 법조일원화가 2011년 법원조직법에 도입됐다. 법관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관료주의·순혈주의를 탈피하자는 사법개혁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판사 지원자 수가 감소했다며 그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는 법원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조직원이 돼버린 판사들의 면면을 이미 알아버린 지금, 우리는 어떤 판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까.

① 2019년 7월26일, 시진국 전 판사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 증인신문
② 2019년 7월24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판에서 공개된 법원 자체 조사 자료
③ 2020년 6월15일, 문성호 전 판사의 임종헌 전 차장 재판 증인신문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 이후 여전히 진행 중인 ‘사법농단 재판’을 법정 르포 형식으로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단독] “명태균, 대통령실 취업 등 청탁 대가로 2억”…검찰 진술 확보 1.

[단독] “명태균, 대통령실 취업 등 청탁 대가로 2억”…검찰 진술 확보

강혜경 “말 맞추고 증거 인멸”…윤 부부 옛 휴대전화 증거보전 청구 2.

강혜경 “말 맞추고 증거 인멸”…윤 부부 옛 휴대전화 증거보전 청구

하루 만에 10도 뚝…3일 최저 -7도, 바람까지 3.

하루 만에 10도 뚝…3일 최저 -7도, 바람까지

버려져 외려 드러난 죽음 ‘암장’...몇 명이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 4.

버려져 외려 드러난 죽음 ‘암장’...몇 명이 죽는지 아무도 모른다

소방서에 배송된 ‘감사의 손도끼’…“필요할 때 써 주시오” 5.

소방서에 배송된 ‘감사의 손도끼’…“필요할 때 써 주시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