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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국가대표 이름 앞에 붙는 ‘미녀’ 또는 ‘마녀’

등록 2021-08-13 21:54수정 2021-08-14 09:44

[한겨레S]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

여성선수 향해 공공연한 외모 평가
좋은 기량 보이면 “남편 사랑의 힘”

국가대표조차도 마녀사냥·사이버테러
성차별 뛰어넘어 먼저 해야 할 일은
한국방송 다큐멘터리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 한 장면. 화면 갈무리
한국방송 다큐멘터리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 한 장면. 화면 갈무리

“시드니올림픽 여자 공기소총 은메달리스트인 강초현 선수의 인기가 폭발적입니다. 예쁘기도 하고….”

“양궁 2관왕의 주인공입니다. ‘얼짱 궁사’ 기보배 선수 모셨습니다.”

“연재가 그렇다. 이제는 사랑받는 국민 여동생이 됐다.”

“하늘 높이 치솟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미녀 배구 군단!”

지난 12일 방영된 한국방송 다큐멘터리 <다큐인사이트: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이하 <국가대표>)의 한 장면이다. <국가대표> 제작진은 자사의 아카이브를 뒤져, 방송이 여자 운동선수들을 다룰 때 실력보다 외모를 먼저 부각시키곤 했던 과거를 끄집어 올렸다. 여자 선수가 실력보다 외모나 성별로 먼저 평가되었던 오랜 차별의 역사에, 자신들 또한 공범으로 일조했다는 고백이자 반성일 것이다. 기록 영상이 나간 직후, ‘배구의 신’ 김연경 선수는 화면을 향해 헛헛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맨날 ‘미녀’를 항상 붙입니다. ‘미녀군단’을 항상 붙여요. ‘미남군단’이라고는 안 하잖아요. 그렇죠? 저는 그런 게 별로였던 게 뭐냐면, 여자 스포츠 선수들은 외모적인 부분들이 항상 먼저 나오는 거 같아요. 실력을 먼저 얘기를 해야 하는데….”

‘선수’보다 ‘성별’ 보는 시선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번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여자 선수들의 비율은 49%다. 여자가 단 한명도 참여하지 못했던 제1회 근대올림픽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오는 데 125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도자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의 수는 남자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국가대표>는 2020년 대한체육회에 등록된 체육 지도자 성별을 인용한다. 남자 2만2213명, 여자 4386명. “여자 핸드볼이 메달을 더 많이 땄는데, 여자 지도자는 없나요?”라는 질문에 핸드볼 국가대표 김온아 선수는 이렇게 답한다. “아무래도 남자가 훨씬 더 많고요. 지금 핸드볼 실업팀에서는 남자 선생님들이 대부분이고, 여성 지도자의 길이 좁고요. 어릴 때는 솔직히 생각을 못 했었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왜 메달리스트 언니들이 지도를 안 할까? 자리가 없는 걸까?’ 하고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차이가 나는 건 지도자 수만이 아니다. 같은 종목에서 똑같이 활약을 해도, 대부분의 여자 선수들은 남자 선수들보다 더 적은 연봉과 상금, 지원을 받는다. 잉글랜드 축구협회(FA) 여성 슈퍼리그 첼시 위민에서 뛰고 있는 지소연 선수는, 첼시의 홈구장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경기를 할 줄 알았는데 정작 동네 공터 같은 곳에서 공을 차야 했던 현실에 기가 막혀 구단에 더 많은 지원을 요구했던 기억을 들려줬다. 한국 골프를 상징하는 박세리 국가대표팀 감독은 여자골프투어와 남자골프투어 사이의 상금 차이를 납득하지 못했던 과거를 이야기했고, 김연경 선수는 남자 선수들에겐 꾸준히 인상되었던 샐러리캡(팀 연봉 총액 상한선)이 여자 선수들에겐 동결이 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뒤 김치찌개로 회식을 하는 여자배구 대표팀 모습. &lt;한겨레&gt; 자료사진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뒤 김치찌개로 회식을 하는 여자배구 대표팀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런 구조적인 차별의 뿌리에는 ‘선수’ 이전에 ‘여자’라는 조건을 먼저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국가대표>는 2016년 리우올림픽 중계 영상을 인용한다. 결혼과 비슷한 시기에 성적이 향상된 수영선수의 플레이를 보며, 해설진은 “(코치인) 남편과의 사랑의 힘”이 아니겠냐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선수의 피나는 노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게 남성 조력자가 도운 결과라고 해설하는 것이다. 5년이 지났지만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옆 방송사인 에스비에스 여자 축구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해설을 맡은 배성재와 이수근은, 명서현이 저돌적으로 수비를 돌파하며 공격에 가담하면 “남편(정대세)에게 배웠나 보다”라고 말하고, 심하은이 킥을 잘하면 “남편(이천수)에게 배웠나 보다”라고 말한다. 남성 조력자의 도움을 선수 개인의 노력이나 기량 향상에 대한 평가보다 앞세워버리니, 여자 선수가 흘린 땀과 기울인 노력의 시간은 자연스레 그 값어치를 잃는다.

스포츠는 원래 세간의 시선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의 연속이다. 하지만 여자 선수들은 오직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더 많은 편견과 제약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국가대표>는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기 자리에서 고군분투해온 여자 운동선수들의 역사를 충실히 기록하는 동시에, 아직도 도달하지 못한 스포츠 성 평등이라는 목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웅변한 작품이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국가대표 박봉식 선수의 기록영상에서 시작해서, 양궁 3관왕이라는 경이로운 성취를 거뒀음에도 머리 스타일이나 세월호 배지 등을 근거로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놓고 사상을 넘겨짚어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벌인 온라인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안산 선수에 이르는 몽타주 영상은 <국가대표>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페미니스트 검증 사이트 생기기도

한국방송이 <국가대표>를 방영했던 날, 공교롭게도 온라인에서는 웹사이트 하나를 놓고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유명인들의 언행이나 옷차림, 헤어스타일, 독서 패턴 등을 이유로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입장을 밝히라고 사상검증을 요구하는 일은 불행히도 온라인에선 일상적인 일이지만, 오로지 그 목적으로 웹사이트가 만들어진 건 또 처음이었다. 자신을 20대 남성이라 밝힌 한 네티즌이 만든 이 조악한 웹사이트는, 가수, 배우, 아나운서, 정치인, 작가 등 다양한 직종의 유명 인사들에게 자의적인 판단으로 ‘확정’, ‘의심’, ‘선봉’ 따위의 등급을 매기고 있다. (나는 그 웹사이트의 이름을 적지 않겠다. 사이트 개설자에게 관심을 받았다는 만족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출전한 국가대표조차도 외모 평가와 사상검증, 사이버테러를 피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누군가는 ‘페미니스트’ 감별사를 자처하며 멋대로 타인의 사상에 등급을 매기고 온라인 마녀사냥과 사이버테러를 부추긴다. 어쩌면 2021년 8월12일 있었던 이 두 장면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의 노력과 성취가 성별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이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기 위하여.

이승한 작가.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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