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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위선 프레임’은 흥미롭다, 그러나 위험하다

등록 2021-08-14 11:47수정 2021-09-28 15:56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프레임의 문제

60여건 성범죄 연루된 미 ‘국민아빠’
성범죄자란 사실보다 ‘위선자’ 지탄
미국 코미디언 빌 코스비(가운데)가 성폭력 유죄 판결을 받고 2년간 복역하던 도중, 지난 6월 재판에 넘겨지는 과정 등에 절차적 하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석방돼 그의 대변인(오른쪽)과 함께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코미디언 빌 코스비(가운데)가 성폭력 유죄 판결을 받고 2년간 복역하던 도중, 지난 6월 재판에 넘겨지는 과정 등에 절차적 하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석방돼 그의 대변인(오른쪽)과 함께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을 물으면 빼놓지 않고 놈 맥도널드를 꼽는다. 그는 굉장히 아슬아슬한 유머를 구사하는 코미디언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기도 한다. 얼마 전 미국의 코미디언 빌 코스비가 성폭력 혐의로 복역 중이다가 돌연 석방되어 미국 사회가 떠들썩한 일이 있었다. 마침 코스비의 성폭력에 대한 폭로가 여기저기서 나올 때 놈 맥도널드가 그에 관한 조크를 던진 바 있는데 이게 굉장히 재미있어서 여기에 간단히 소개를 해볼까 한다.

“친구 한명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 빌 코스비가 최악인 점은 그가 위선자였다는 점이라고. 난 동의하지 않았지. 그게 최악이라고? 강간범이라는 게 최악이 아니라? 그다음으로 최악인 건 약을 먹였다는 거고, 위선자였다는 건 저 한참 밑에 있어야지. 내가 전문가는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강간범들이 위선자들이었을 거야. 안 그래?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거 아니야. ‘나는 강간하고 싶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간이 좋다고.’ (이렇게 말했으면)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니까 최악은 아니겠네? 우리가 여자애라고 상상해보자. 빌 코스비가 나한테 접근하더니만 갑자기 내가 쓰러져버린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게 뭐야, 내 눈앞에 웬 코스비 성기가 있네. 코스비 성기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가만있어봐, 이제 기억이 날 것 같아. 아무래도 도움을 구해야겠어. 도와주세요! 위선이야! 빌 코스비가 나한테 위선을 저지르고 있어요!”

‘국민아빠’ 코스비의 실체

잘 알다시피 빌 코스비는 ‘국민아빠’로도 불리던 전설적인 원로 코미디언이다. 미국의 코미디언은 물론이고 많은 연예인이 코스비의 시트콤을 보고 그를 존경하면서 성장하고 연예인의 꿈을 키웠을 테다. 코미디언들에게 빌 코스비 성대모사는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따라서 코스비의 성폭력 폭로가 나왔을 때 미국 연예계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도 만만찮게 나왔다. 사실 코스비의 만행은 미국 연예계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폭로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 코미디 프로그램들에서는 코스비가 거론될 때면 항상 성추행 관련한 인사이드 조크(특정 집단 내에서만 이해하는 농담)가 은근하게 나오곤 했다. 하지만 코스비가 거물이었던 탓에 대놓고 이야기하거나 그의 행동을 막을 시늉이라도 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자신의 스탠딩 코미디 쇼에서 “그 새끼 강간범이에요”라고 외쳤던 해니벌 버리스가 유일할 것이다.

미국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사례와 비슷하게 코스비는 할리우드 동료 연예인들과 고위 관계자들의 방관 혹은 비호 아래 수많은(알려진 고소만 60건이 넘는다)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했다. 비호라는 말이 지나칠지도 모르지만, 상당수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억만장자이자 끔찍한 조직적 성범죄자였던 제프리 엡스틴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사실이 드러난 만큼 미국 대중이 코스비에 관련해서도 비슷한 의구심을 갖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대중의 시선을 의식한 연예인들은 가장 존경하는 연예인으로 코스비를 꼽고 그와의 특별한 인연을 과시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코스비가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성범죄자를 가리켜 위선자라고 비난한 의도는 매우 뻔하다. 선한 척을 했기 때문에 그의 만행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와 가깝게 지냈지만 자신하고는 전혀 무관한 일로 거리를 두려는 의도였다. 놈 맥도널드는 바로 이것을 조롱한 것이다.

범죄에 위선 프레임이 씌워지면 가장 중요한 것이 사라져버린다. 범죄행위 그 자체 말이다. 한국에서 정부·여당발 비위가 보도될 때면 항상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 키워드가 위선이다. 위선을 욕하기는 쉽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짓을 저지른 사람도 돌을 던질 수 있다. 위선 프레임이 강해지면, 비리를 저지른 사람과 같이 상류층 사회에서 암암리에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널리 자행되던 방식으로 부정 축재에 가담했거나 그것을 지근거리에서 뻔히 지켜봐왔던 다른 사람은 은근슬쩍 비난 여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어떤 비리를 저지른 유명인과 사회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유난스럽게 그의 위선과 ‘내로남불’을 물고 늘어진다면 한번쯤 의심을 해봄 직하다.

범죄·비리행위에 반복된 위선 프레임
대놓고 나쁜 자를 더 자유롭게 한다

‘위선 프레임’으로 진실 흐려선 안 돼

그리고 위선을 욕하기는 더 재밌다. 위법행위 자체와 전혀 무관한 피의자의 과거사까지 캐내어 단죄의 레토릭으로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위선을 떨며 던졌던 사회적 메시지 및 활동들과 그 사람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열거하여 그 부조리함을 조롱하고 망신 주는 것은 일종의 오락거리가 되고 있다. 지배 계층의 표리부동함을 폭로하는 데에는 이만하게 탁월한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유희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위법행위가 시야에서 사라질 뿐만 아니라, 위선의 일환으로 던진 사회적 메시지의 가치마저도 깡그리 부정돼버린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한 남자가 성범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이 사람이 활발하게 여성혐오를 비판하고 페미니즘을 주창하던 사람이다. 언론은 그 사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여론은 이 사람의 위선을 비난한다. 이러한 가십거리가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반복되면 ‘남성 페미니스트=위선’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지고 이것은 곧 ‘페미니즘=위선’으로도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사실상 모든 진보적 의제에 위선 프레임이 씌워지고 있다.

범죄·비리행위에 위선 프레임 씌워지기가 반복되면 결국 ‘위선은 나쁘다’라는 공식만 남게 된다. 이 공식은 청년들 사이에서부터 천천히 지고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말하자면 ‘생각의 그물망’처럼 되어, 위선을 떨지 않고 대놓고 나쁜 짓을 벌이는 사례는 이 그물망에 걸리지 않게 된다.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니까 최악은 아니네?’라는 놈 맥도널드의 웃긴 대사는 지금 여기저기서 아주 진지하게 언명되고 있다.

김내훈 작가, 미디어문화 연구자. 첫 책 <프로보커터>에서 극단적 도발자들의 ‘나쁜 관종’ 현상을 분석했다. 한국의 20대 현상과 좌파포퓰리즘, 밈과 인터넷커뮤니케이션 같은 디지털 현상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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