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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놓고 나쁘니까, 배신도 기만도 없는 집권 세력

등록 2023-01-14 16:00수정 2023-01-15 09:26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보수 진영의 ‘팬더링 프레임’
지난 6일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왼쪽)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답변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6일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왼쪽)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답변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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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더링’(Pandering)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상 의미는 뚜쟁이질, 즉 어떤 나쁜 짓을 중개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특정 정치인, 정치 세력을 비난할 때 이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영합하다’라는 뜻으로 말이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짐작해서 진정성은 전혀 없이 다만 얄팍한 호응을 위해 텅 빈 표현만 하는 것에 저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예컨대 한 정치인이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관련한 공개적인 발언을 했을 때, 비판자들은 그의 행동을 ‘Pandering to Black’(흑인을 위하는 척한다)이라고 하고, 성소수자(LGBT)의 권리를 말하면 비판자들은 ‘Pandering to LGBT’(LGBT를 위하는 척한다)라고 하며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한다.

 위선 없는 정치는 가능할까

주목해야 할 것은 인종차별, 성소수자 권리, 여성 문제 등 이른바 진보 혹은 ‘리버럴’ 진영에 좀 더 닿아 있는 의제들에 ‘팬더링’이라는 비난이 주로 따른다는 것이다. 진심이 전혀 없이 그저 어떤 지적인 유행에 편승하며 이른바 ‘깨어 있음’을 과시하는 ‘착한 척’, 즉 위선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보적인 메시지 및 가치, 의제에 위선이라는 말이 늘 따라다니는 것은 동서를 불문한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적 의제에서는 진보와는 매우 거리가 먼 정치인이 진보의 상징자본을 취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 및 정치적 올바름 의제의 첨병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례가 미국에 굉장히 많았고, 특히 2020년 대선 전후로 그랬다. 평소 노동자 권리에는 전혀 무관심해 보이는 대기업들이 매년 6월이 되면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라며 로고에 무지개색을 박아 넣는 행태는 이른바 ‘깨어 있는 자본주의’(Woke capitalism)라고 조롱받는다.

한국의 경우,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 올바름 의제로써 인기에 영합하려고 ‘팬더링’ 하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저 의제들 자체가 대중적으로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 담론에서 진보적 의제들은 부문을 막론하고 항상 위선과 결부되는 것으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된 논리적 경로에 대해서는 2021년 8월14일치 글(‘위선 프레임은 흥미롭다, 그러나 위험하다’)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요컨대 정치권과 언론이 야합하여 견고하게 주조해낸 위선 프레임이 대중 담론에서 가식 및 ‘거짓된 선’과 범법 행위 및 ‘진짜 잘못’의 경중 설정을 혼탁하게 만들어버렸다.

여기에는 이중의 효과가 있다. 진보진영의 한 유명 인사가 과거에 던졌던 사회적 메시지와 그의 실제 행태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정치권과 언론들은 이 간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대중으로 하여금 모든 진보적 메시지에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내게 만들고, 위선이 아닌 ‘진짜 잘못’은 암암리에 세간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드는 것이다. 급기야 대놓고 나쁜 짓을 벌이는 것이 차라리 위선보다 낫다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 확산하게 된다.

미국에서 진보 정치인들의 발언과 행동에 ‘팬더링’이라는 딱지를 붙이던 좌파 성향 비평가들, 논객들 가운데 일부는 천천히 자연스럽게 트럼프 지지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일부 논자들은 어떤 정치 세력이 국민을 ‘속이는’ 행위가 악 중에서 최악이라고 말하며, 처음부터 대놓고 나쁜 짓을 벌이는 정치 세력이 있으면 국민은 바로 분노하며 들고일어나서 그 세력을 끌어내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이야기했다. 이것이 “민주당만 빼고”라는 명제로 표상되는, ‘차악이 최악’이라는 논리였다.

배신과 위선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문제 삼은 결과, 배신하지 않고 위선을 떨지 않는 세력이 집권했다. 하지만 나라면 일체의 가식과 위선 없는 정치인을 지지할 바에 착한 척하는 정치인에게 배신당하는 것을 택하겠다. 단언하자면 위선 없는 정치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동등하고 자격을 갖춘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실제 자신보다 더한 모습으로 가장한다. 장 자크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우월성에 대한 욕구가 발생한다. 따라서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징표를 둘러싼 경쟁이 일어난다. 경쟁의 일환으로, 실제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공동체의 규범을 준수하고, 사회적으로 확립된 기준에 맞추어 판단하고 행동한다. 즉 가식과 위선이다. 가식과 위선으로 형성되는 인정관계는 사회의 근간 그 자체다. 사회관계는 어떤 사람들을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상호 간 어떻게 인정받는가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군림하려는 집권 세력

따라서 통치 행위는 반드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통치자들은 시민들을 유권자로 인정하고 동등한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정해야 하며 그로써 유권자들로부터 자신이 통치할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자연히 일정 정도의 위선이 없을 수 없다. 자신의 됨됨이가 남들보다 낫다는 것을 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거짓 공약과 기만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위선과 그에 따른 배신만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프레임에 전 사회가 포획되고 그것만을 중심으로 정치 담론이 형성됐을 때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가식과 위선은 일절 없는 세력이 집권했다. 시민들을 유권자로, 동등한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시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조금의 노력도 안 하면 적어도 배신과 기만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통치가 아니라 군림이다. 대놓고 나쁜 게 위선보다 낫다는 위험한 발상이 확산한 탓에 정부가 국민을 인정하기는커녕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음에도 국정 지지율은 더 떨어지지 않는다. 국민은 국민대로 정부에 인정받지 못한 채 각자의 인정투쟁에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다. 즉 한국 사회의 인정체계가 완전히 붕괴하고 있고 이것은 곧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는 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놓고 나쁘니까 국민이 바로 봉기할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으로 윤석열 세력의 집권을 묵인한 논자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한다.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들께 감사합니다.

첫 책 <프로보커터>에 이어 <급진의 20대>를 썼고, <인싸를 죽여라>를 번역했다. 한국의 20대 현상과 좌파 포퓰리즘, 밈과 인터넷커뮤니케이션 같은 디지털 현상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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