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지난 13일 가석방으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참여를 두고 사실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시민사회에서는 “법무부 장관이 재벌의 탈법 행위를 조장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범계 장관은 19일 정부과천청사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행보와 관련해 “이 부회장은 몇 년째 무보수·비상임·미등기 임원”이라며 “주식회사는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통해 최종 의사결정을 하는데, 이 부회장은 미등기 임원이라 이사회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다. 이런 요소를 고려하면 취업이라고 보긴 어렵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제가 특별히 취업제한 승인과 관련해 삼성을 조사할 권한과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박 장관은 앞서 18일에도 “무보수와 비상근 상태로 일상적 경영 참여를 하는 것은 취업제한의 범위 내에 있다”며 이 부회장의 경영참여가 가능하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은 박 장관의 발언이 취업제한 규정의 입법 취지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회사를 상대로 재산상의 범죄를 저지른 자의 범죄 가능성을 막기 위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가법)에 취업제한 규정을 둔 것”이라며 “박 장관은 이 부회장의 ‘직위’만 보고 취업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경영이 가능한 ‘직무수행 능력’은 판단하지 않았다”고 짚었다. 이 부회장이 삼성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앞서 지난 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재판장 김국현)는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낸 취업승인 거부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하며 취업제한 규정의 취지를 강조했다. 당시 재판부는 취업제한 규정에 대해 “범죄행위자가 범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기업체에서 일정 기간 회사법령 등에 따른 영향력이나 집행력을 행사·향유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관련 기업체를 보호하여 건전한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취지로 제정됐다고 판시했다.
‘재벌 총수를 위한 탈법 지침을 줬다’는 비판도 나온다. ‘무보수·미등기·비상임’ 상태만 유지하면 특경가법을 어겨 유죄 판결을 받아도 취업제한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신호를 줬다는 설명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참여는 취업제한을 명백히 위반한 사안”이라며 “한국 재벌 다수가 미등기 임원으로 있으면서 기업을 경영하는 상황에서 법무부 장관이 책임과 권한의 불일치를 조장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론 총수가 ‘바지사장’을 세워 경영하면 취업제한에 걸리지 않게 되는가. 법무부가 ‘삼성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시민사회단체들도 일제히 박 장관의 발언을 문제삼으며 사퇴를 촉구했다. 참여연대는 이날 논평을 내어 “삼성 불법합병, 국정농단 뇌물 공여 등 때부터 이 부회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이사회는 거수기에 불과했다”며 “미취업 상태에서 경영을 챙긴다는 것은 그만큼 삼성의 지배구조가 취약하다는 방증일 뿐이며, 법이 금지하는 명백한 취업제한 위반행위다. 취업제한 입법 취지를 무너뜨리는 박범계 장관은 사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제개혁연대도 “취업제한의 입법 목적과 구체적인 법률조항, 일반적인 ‘취업’의 의미를 고려할 때 ‘무보수·미등기·비상근’이면 경영에 참여하더라도 취업 상태가 아니라는 박 장관의 발언은 취업제한 규정을 완전히 왜곡하는 해석일 뿐 아니라, 법률이 정한 범위를 한참 넘어서는 월권”이라며 “박 장관은 즉각 사퇴하라”고 비판했다.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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