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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멀리서 날아와, 나를 상처 내는 것들에 대하여

등록 2021-10-09 15:37수정 2021-10-09 15:44

[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 스스로 돌볼 줄 몰랐던 나

작은 일에도 소용돌이 휩싸이던 나
접시 와장창해도 소리내 웃게 됐다
경직돼 있던 나를, 강하다고 믿었다
후회 없는 지금을 위해 다시 걷는다
그림 박조건형
그림 박조건형

와장창 접시를 깨고 나면, 일단 나는 소리 내어 웃기부터 한다. 허술한 손놀림에 허튼 생각에 빠졌다가 깨트린 접시는 누가 봐도 내 탓인데, 나는 일단 웃는다. 웃음으로 내가 만든 엉망진창 앞에 선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혼자 견뎠던 시간이 오래라 그랬는지 나는 이따금 별것 아닌 일들로 까무룩 가라앉곤 했는데, 그때마다 혼자인 시간은 불필요하게 더 깊은 곳으로 나를 떠밀었다. 갑자기 화를 쏟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면, 그 원인이 뭘까, 나조차도 내가 연구 대상이다. 시간이 흐르고 이성적으로 하나씩 되짚어볼 수 있게 되고서야 도대체 내가 왜 그랬나, 내 머리를 내가 쥐어박고 만다. 그러고 가만히 되짚다 보면, 어쩌면 기억 속에 사라진 어느 순간 사소한 일들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닌가 깨닫는다. 사람의 몸이란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비워지는 몸이 아니라, 애써 비워야 하는 몸이구나. 스스로를 돌볼 줄 몰랐던 나를 뒤늦게나마 짚어낸다.

멀리서 날아와 나를 상처 내는 것들

깨진 접시 앞에 웃고 나면, 잠시 깨진 것들을 들여다본다. 어디까지 깨진 조각이 날아갔나 살핀다. 맨발인 두 발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서, 먼저 큰 조각들을 주워올리고, 바닥을 문질러 닦으며 작은 조각들까지 모은다. 다 닦고 나서도 한발 더 나아가 나도 모르게 멀리 튄 조각들이 있을까, 놓치지 않기 위해 꼼꼼히 닦는다. 그렇게 바닥에 들러붙은 먼지까지 끌어모아 신문지로 감싸고 테이프로 둘둘 감고 나면, 이제 그 위에 ‘유리 조심’이라고 두꺼운 유성 펜으로 적는다. 깨진 것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날아가 상처를 내는 법, 내 눈앞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를 위해 적는다. 눈앞에 없지만 다칠지도 모를 누군가를 또렷이 그려낸다.

그러고 나면, 이제야 비로소 아주 잠깐 내 탓을 한다. ‘네가 또 그렇지, 쓸데없는 데 마음을 뺏겼지.’ 씻다 만 그릇 앞에 서서 다시 손을 움직인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사람 아닌가, 후회할 짓을 하고 마는 게 사람이지.’ 그렇게 나를 용서한다.

“살면서 저지른 후회스러운 일들이 깨진 접시 조각 같은 것이면 좋으련만, 지난 시간의 조각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닦아내기도 쉽지 않다.” 사진 김비
“살면서 저지른 후회스러운 일들이 깨진 접시 조각 같은 것이면 좋으련만, 지난 시간의 조각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닦아내기도 쉽지 않다.” 사진 김비

살면서 저지른 후회스러운 일들이 깨진 접시 조각 같은 것이면 좋으련만, 지난 시간의 조각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닦아내기도 쉽지 않다. 오십을 넘겨 제일 큰 후회는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나의 태도를 일찍 정리하지 못한 일이다. 사람이 태어나며 ‘가진 것들’이란 모두 다른데, 나는 너무 오래 ‘갖지 못한 것’에 붙들려 있었다. 몸의 문제든 심리적 문제든 육체적 한계야 어쩔 수 없더라도, 가족이나 환경에 대한 상실감 혹은 박탈감은 충분히 다른 태도로 마주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가령 사랑을 제대로 줄 줄 모르는 부모 밑에 자란 나는, 부모나 가족의 사랑 말고 보편적 인간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인간적 사랑을 더 일찍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일상적 폭력이 빈번한 가정 속에 나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어디에 도움을 청해야 할까, 성별을 떠나 나는 일찍부터 좀 더 기민한 인간이 될 수도 있었던 건 아닐까?

어렸을 때 일이 어릴 때 일로 끝나면 좋으련만, 새하얀 눈밭 위의 첫걸음처럼 그건 쉬이 지워지지도 않는다. 다른 눈을 쌓고 발끝을 움직여 다독이면 다시 원래의 눈밭처럼 보이겠지만, 거기에 팬 자국이 있다는 걸 나는 안다. 극복해보려는 마음이나 망각하려는 의지조차 내가 아닌 나로 만들어 나를 휘청이게 할 것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괄호’ 안에 가두고서, 나를 위한 나만의 자유를 찾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시작해야 하는 건지도.

또 하나의 후회는, 나 스스로 ‘나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서로 연결된 것이 삶의 흐름이니, 나는 청년 시기까지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붙들린 삶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성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내 성별이 무엇이든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안의 ‘나의 가치’를 믿고 들여다볼 수 있어야 했는데, 그걸 알지 못했다.

성별과는 상관없이 한 인간으로 보자면, 나는 아마도 외향적이기보다 내성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감성이나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으니 일찍이 그런 나에게 필요한 배움이 무얼까, 나는 어떤 것에서 내 삶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찬찬히 짚어볼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다양한 생을 읽고 더 깊은 공감의 훈련을 통해 내 안에 스며든 고립의 감각을 지워야 했는데, 내 청년 시절은 통째로 혼란에만 붙들려 있었다. ‘혼란’을 뚝 떼어 놓고서 그 나머지 삶을 지켰어야 했는데, 나는 너무 허약했다. 강해져야 한다는 다짐은 강한 내가 아니라 지독한 내가 되게 했고, 나는 고통은커녕 순간의 기쁨이나 즐거움조차 제대로 표현하고 누릴 줄 몰랐다. 그런 나를 ‘강하다’고 믿었다. 경직되기만 한 나를, 강한 나라고 믿고 말았다.

단단한 새살을 만지작거린다

조심하고 애써본다면 칠십이나 팔십까지는 살아지겠지만, 그때 돌아보게 될 이십여년 전의 지금에는 또 어떤 후회가 남았을까? 영화 속에서는 시간 여행을 하고 멀티버스를 넘나들지만, 우린 제 삶의 후회를 미루어 짐작하는 일조차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걸까? 그래도 몇가지는 확신한다. 남은 내 삶의 가치를 내 힘으로 찾아가는 것, 내 삶의 즐거움을 뒤로 미루지 않는 것, 많이 웃는 것, 곁을 지켜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깨트린 것들 앞에, 나를 용서하는 것.

누군가의 눈에는 구질구질하고 비루한 삶일 테지만, 티끌만큼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제야 나는 조금이나마 내 삶의 균형을 잡고 산다. 자학하지 않고서 깨진 것들을 들여다보고, 마음속 째진 상처들을 어루만진다. 흉터가 난 자리에 들러붙은, 못났지만 단단한 새살을 만지작거린다. 거기에 흉터가 있지, 내가 저지른 어리석은 시간들이 쌓였지.

그러나 나를 궁지로 내몰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선다. 돌아서, 내가 가야 할 길만 바라본다. 후회 없는 삶 말고, 후회 없는 이십대나 삼십대 말고, 후회 없는 지금, 여기, 오늘, 이 순간의 나를 위해. 다시 나의 걸음을 걷는다, 나의 속도를 믿는다.



__________
김비 소설가 _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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