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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신영전 칼럼] 김정은 위원장께, “8만6212명입니다”

등록 2021-10-12 18:04수정 2021-10-13 14:49

종전선언도, 남북 간 경제협력과 감염병 공동대응도 좋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은 남북 이산가족의 화상 상봉입니다. 전화선으로 바이러스가 왔다 갔다 하지도 않을 테니 코로나도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핵이나 군사훈련도 이유가 되지 못하고, 비핵화를 위한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도 이산가족의 상봉을 막을 명분이 되지 못합니다.

신영전

8만6212명입니다.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고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은 분들의 수입니다. 이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에는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수가 더 많습니다. 상봉 신청을 안 한 사람의 수까지 따지면, 이산가족 수는 남쪽만 500만명에 달하고 북쪽과 국외 동포를 합치면 그 수가 2배를 훌쩍 넘을 것입니다.

그중 한분인 조성덕 할머니는 평남 평원군 숙천면 미암리 177에서 태어나 마을 언덕에 묻힌 남편 신언준의 무덤을 돌보지 못한 것을 평생 죄스러워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장남 신일철은 철조망이 열리는 날 죽은 몸이라도 제일 먼저 달려가 아버님 묘소에 술 한잔 올리려 휴전선에서 가까운 파주 실향민 묘지에 누워 있습니다. 6·25 전쟁 때 북에 놔두고 온 외아들을 위해 매일 새벽마다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기도를 올리시던 오현관 할머니의 기도 소리도 이제 멈췄습니다.

314명입니다. 지난 8월 한달 동안 그리움과 회한 속에 마지막 숨을 거둔 분들 수입니다. 오늘 하루만도 열분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1만3042명입니다. 현재 남쪽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이들 중에 90살 이상인 분들의 수입니다. 80살이 넘은 분들도 3만1043명에 달합니다. 이제 몇년 후엔 이승에 없을 분들입니다. 하루가 급한 이유입니다.

지난 20차례의 상봉으로 1만1241명이 직접 또는 화상으로나마 만나 잠시 한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65년 만에 아버지를 상봉한 오장균씨는 그날 이후 더욱 사무치는 그리움에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아흔이 다 되어가는 노모와 망원경을 들여다봅니다. 상봉장에서 북쪽 아버지와 헤어지며 보름마다 뜨는 달을 남과 북에서 함께 보자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19살에 결혼하여 6개월26일 만에 남편과 헤어져 70년간 홀로 아들을 키우며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동생 조카 셋을 돌보고 일년에 열몇번의 제사도 도맡아 해온 이순규 할머니는 남편이 쓰던 요강과 구두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결혼할 때 산 분첩은 남편이 떠난 후 열어보지 않아 뽀얗게 두꺼운 먼지만 앉았습니다. 지난 상봉 때 정신이 황망하여 남편 한번 제대로 끌어안아 보지 못하고 다시 북으로 돌려보낸 한이 더해져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 갑니다.

며칠 전 끊겼던 남북 연락선이 다시 연결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이지 남조선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긴 가뭄 끝에 내리는 호우처럼 기쁜 소식이지만, 서로 주적이 아님을 확인하는 수준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종전선언도, 남북 간 경제협력과 감염병 공동대응도 좋지만, 여전히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남북 이산가족의 화상 상봉입니다. 전화선으로 바이러스가 왔다 갔다 하지도 않을 테니 코로나도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핵이나 군사훈련도 이유가 되지 못하고, 비핵화를 위한 미국과 유엔의 경제제재도 이산가족의 상봉을 막을 명분이 되지 못합니다. 가족을 못 만나고 죽은 수만명의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이 올 리 만무합니다. 가족들끼리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종전선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70년간 아내와 남편이, 아들과 어머니가 만나지 못하는 깊은 슬픔 위에 지상낙원은 세워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임금 왕(王) 자를 자신의 몸에 새기지 않고 인민의 가슴에 새깁니다.

마을 어귀까지 버선발로 달려 나와 돌아온 탕아를 맞이하던 아버지처럼, 어머니 아버지 아내와 남편이 있는 고향의 품은 늘 넉넉하고 따뜻해야 합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어떤 정치이념이나 경제적 산술로 가로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 길을 막아서거나 화상 상봉 장비와 인도적 지원 물자 반입을 막는 이들이 있다면, 남쪽이든 북쪽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일본이든 그놈이 나쁜 놈입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지옥의 가장 깊은 곳은 그의 몫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70년 된 이 단단한 한의 사슬을 푸는 이가 있다면, 구천을 떠도는 수백만 한 맺힌 영혼과 함께 한반도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8천만 인민들은 그가 남쪽 사람이든 북쪽 사람이든, 소리 높여 그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결단하십시오.

6·25 전쟁 때 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집을 못 찾을까 70년째 이사도 안 가고 서울 행당동 115번지를 지킨 이기묘씨의 어머니, “그래도 어머니는 7개월이라도 같이 살았잖아요?” 아버지가 떠나던 날 엄마 배 속에 있었던 칠순의 아들은 오늘도 아흔이 다 된 늙은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지만, “죽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상봉장을 떠나간 늙은 아버지의 말에 오늘 밤도 대문 앞 등을 켜놓고 마당에 나와 앉았습니다. 어느새 그의 입에선 아흔의 노모가 평생 흥얼거리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몸부림치며 울며 떠난 사람아”

한양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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