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될 의대 정원 배정은 조건부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기적인 평가를 통해 애초 목표인 취약지 배치, 필수의료영역 의료인 양성, 좋은 의사 육성이라는 세가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늘려준 정원을 회수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충북대학교 개신문화관에서 열린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필수의료혁신 전략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신영전ㅣ한양대 의대 교수
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에는 두개의 블랙홀이 있다.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이다.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최근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이 발표되었지만, 늘어난 의사들도 결국 서울로, 돈 되는 영역으로 가버릴 것이니 백약이 무효라는 우려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지난 8월, 강원 삼척시에 사는 80살 ㄱ씨는 병원 7곳을 돌아도 받아주는 곳이 없어 숨졌다. ‘응급실 뺑뺑이’다. 지난달 대구의 ㄴ씨는 갑자기 고열이 나는 6살 아이를 안고 새벽부터 소아과 문 앞에서 줄을 서야 했다. ‘소아과 오픈런’이다. 지난 6월 강원도의 임신부 ㄷ씨는 분만실을 찾아 2시간을 헤매다 결국 서울 한 병원까지 헬기로 이송되었다. ‘산부인과 헬기런’이다. 오늘도 빅5 병원에서 치료받기 위해 지방에서 기차를 타고 수서역에 내린 암 환자들의 셔틀버스 대기 줄이 50m가 넘는다. ‘암 환자 고속열차런’이다.
이런 비극적 장면의 원인 중 하나가 의사 부족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의 의사 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대비로 이미 7만~8만명 부족하고, 현 정원을 유지할 경우, 2030~2040년에는 1만4천~4만명까지 부족해질 것이라 한다.
지난달 19일, 윤석열 대통령은 의사 수를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또 국립대병원을 보건복지부 소관으로 이관해 지역 필수 의료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공공의대 설립과 공공병원 확대, 의대 정원 확대 규모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것만 빼면, 정치적 입장과 무관하게 그간 전문가들이 요구했던 내용을 상당수 담고 있다.
하지만 우려도 있다. 가장 큰 우려는 이번 발표안이 국민의 아픔을 해결하기보다는 개혁에 실적을 내지 못해 초조한 정권, 총선 구호가 필요한 정치권, ‘값싼’ 의사가 필요한 병원계, 의과대학 유치로 위상을 높이려는 대학들의 로비가 주된 이유라는 분석 때문이다.
현재 의료체계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이 아니라, 개인의 도덕성을 갖추고 필요한 곳에서 제 노릇을 하는 ‘좋은’ 의사를 확보해야 한다.
의료 취약지와 필수 의료영역을 지키는 좋은 의사와 좋은 병원이 있으려면 의사의 헌신성을 넘어 ‘착한 적자’를 보전해줄 정부의 의지와 실효적 장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최일선에서 대응했던 공공병원 대다수가 당장 직원 월급도 주지 못할 만큼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다. 노조 추산 2023년 적자분 해소만을 위해서도 최소 3500억원 이상 필요한데, 정부의 2024년도 회복기 지원 예산은 0원이다. 이런 식이라면 망가진 공공병원의 현재는 지역의료 거점인 국립대병원의 미래가 될 것이다.
실손보험, 영리 유전자 검사 허용 등 의사들을 영리 영역으로 밀어 넣는 정부의 의료영리화 정책도 문제고, 이미 30~40%에 달한다는 과잉·불법 진료와 병의원 관리 역량도 갖추지 못한 채 의사 수만 늘리려는 것도 우려의 이유다.
이번 정책이 몇몇 기득권 세력의 의대 정원 나눠먹기 잔치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이번 개혁안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 직속 보건의료발전위원회(가칭)를 만들어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시민 참여도 대폭 늘려야 한다. 둘째, 이 위원회는 적정 의사 수 산출과 확대뿐만 아니라 지역·분야별 적정 배치와 ‘좋은 의사’ 육성이라는 세 가지 정책안을 동시에 만들어야 한다. 셋째, 아울러 충분한 규모의 구체적이고 안정적인 재원 확보 방안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확대될 의대 정원 배정은 조건부로 이루어져야 한다. 정기적인 평가를 통해 애초 목표인 의료 취약지 배치, 필수 의료영역 의료인 양성, 좋은 의사 육성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늘려준 정원을 회수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을 경우, 늘어난 의사들이 여전히 수도권에서 비필수 의료영역에 머물면서 없는 의료 수요도 만들어내는, 이른바 “빈 병상은 채워지기 마련이다”라는 보건정책가 밀턴 로머의 저주가 구현될 것이다. 반면, 급속한 고령화와 지방 붕괴 속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비싸진 의료비로 파산하는 민초의 비명이 하늘에 가득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블랙홀은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우주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미세한 세계를 지배하는 무작위 양자 효과로 인해 블랙홀이 누출되고 결국 폭발하여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때쯤 우리도, 서울도, 우리의 의료체계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폭발 전에 이 블랙홀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한양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