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국회에서 열린 한국방송공사 국정감사에서 일부 국회의원들은 공영방송의 책무를 무시한 채 “<오징어 게임> 같은 콘텐츠 생산”을 요구하는 발언을 했다. 넷플릭스 제공
2009년 2월4일 과천정부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 참석했던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닌텐도 게임기 같은 것을 우리는 왜 못 만드나? 닌텐도 같은 게임기를 개발하는 데 만전을 기해달라.” 한창 닌텐도가 가정용 게임 콘솔 ‘위’(Wii)와 휴대용 게임 콘솔 ‘닌텐도 디에스(DS)’ 시리즈로 게임 콘솔 시장에서 제 존재감을 다시 뽐내던 시기였다. “옆집 애는 이번에도 올100 받아 왔던데, 네 성적은 왜 이러니?” 같은 발언이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한숨을 쉬었다. 한국의 게임 생태계는 콘솔 중심이 아니라 패키지 게임 중심으로 성장했고,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강세를 보여왔다. 그런데 갑자기 닌텐도 디에스에 버금가는 휴대용 게임 콘솔을 개발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콘솔 구매를 고려할 만큼 매력적인 독점 게임 소프트웨어 라인업을 확보하고, 내수 시장에서부터 경쟁력을 키워 해외 시장으로 나아가자고? 잘할 수 있는 것들, 이미 잘하고 있는 것들을 두고? 휴대용 게임 콘솔을 개발하던 몇몇 중소기업은 대통령의 발언에 힘입어 활로를 모색해봤지만, 소프트웨어 라인업 확충이나 충성도 높은 소비층 개발은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우리도 한번 해보자’라며 운을 뗐던 정부의 지원은 미약했다. 한국 게임 산업이 처한 환경과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정치권의 구호는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명텐도’의 추억을 떠올린 건, 지난 12일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의 한국방송공사(KBS) 국정감사 때문이었다. 과방위 소속 야당 국회의원들과 여당 국회의원들은 각각 보도의 편향성을 의심하는 질의와 언론의 독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방어를 약속 대련처럼 익숙하게 주고받았다. 여기까지는 매년 나오는 익숙한 질문이었지만, 올해 국정감사에는 좀 특별한 질문들이 나왔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2021)의 전세계적인 성공에 고무된 국회의원들은, 뜬금없이 한국방송공사를 향해 “우리도 이런 거 해보자”는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박성중 국민의힘 의원은 양승동 한국방송공사 사장에게 “한국방송공사는 왜 <오징어 게임> 같은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느냐”고 물었고,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흥행으로)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한국방송공사가 그런 역할을 선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맞다. 또 “옆집 애는 이번에도 올100 받아 왔던데”다.
일단 박성중 의원이나 조정식 의원이 <오징어 게임>을 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한국방송공사가 유리판으로 만들어진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추락사한 사람의 머리에서 뇌수가 흘러나오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드라마를 만들어서 방영했다면, 아마 과방위 의원들의 국정감사 질문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분명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공영방송에서 이런 수위의 작품을 방영해도 된다고 생각하는가?”라며 크게 질타했으리라. 유료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다국적 사기업 넷플릭스에서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와, “모든 시청자가 지역과 주변 여건에 관계없이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무료 보편적 서비스 제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설립 목적인 국가기간방송사 한국방송공사에서 보여줄 수 있는 콘텐츠를 등가비교 하는 일부터가 몰상식한 일이다.
더구나 한국방송공사는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을 만들어 세계적인 흥행을 하라고 만든 회사가 아니다. 한국방송공사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방송법 제43조 제1항에서 명시하듯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를 정착시키고 국내외 방송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기 위함이다. 그 누구도 부당하게 방송 서비스에서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텔레비전을 소유한 국민에게 기본 수신료를 제외하고는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난시청 지역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시청각장애인들의 동등한 정보접근권을 위해 화면해설 방송 및 자막, 수어 방송을 제공해 그것을 방송 표준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존재 이유인 셈이다. 나아가 방송이 연령, 성별, 출신 지역, 학력, 재력, 종교, 장애, 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내용으로 채워지도록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한국방송공사의 가장 큰 책무다.
그런 일을 하라고 국민들은 한국방송공사에 수신료를 내고, 한국방송공사는 직원들에게 높은 연봉을 보장해준다. 수입은 우리가 채워줄 테니, 상업성과 자본의 논리 때문에 공영성을 포기하지 말라고. 아무도 미국의 공영방송 피비에스(PBS)를 향해 “왜 너희는 에이치비오(HBO)처럼 <왕좌의 게임> 같은 작품을, 넷플릭스처럼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니?”라고 묻지 않는다. 그러라고 만든 방송사가 아닌 걸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정감사 기간 동안 국회의원들이 한국방송공사에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면 그건 “왜 너희는 쟤들처럼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을 내지 못했느냐”가 아니라 “왜 너희는 방송의 공영성을 더 열심히 강화하지 않았느냐”가 되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차별 없이 양질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너희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느냐”가 되어야 한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그나마 “우리는 왜 닌텐도 같은 거 못 만드냐”고 물은 이명박은 국내 산업 환경과 맥락만 헷갈렸지, “한국방송공사는 왜 <오징어 게임> 같은 거 못 만드냐”고 물어본 국회의원들은 한국방송공사의 존재 이유 자체를 헷갈렸다. 공사의 존재 이유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방송의 공영성을 제대로 세우라고 만들어둔 방송사를 향해 상업적인 성공을 통해 전세계에 콘텐츠 파워를 과시하라는 주문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상업성을 강화하기 위해 공영성을 타협하는 결정, 콘텐츠 경쟁력 제고를 최우선 순위로 놓기 위해 다른 책무들의 우선순위를 뒤로하는 결정이 내려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잘못된 질문을 던지면 필연적으로 잘못된 답이 나온다. 공공의 것에 ‘돈 되는’ 경쟁력을 묻는 천박함을, 이제는 졸업할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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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 _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