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한 인도 출신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 유튜브 갈무리
종영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미국 드라마 <로스트>(2004~2010) 속 한국 묘사는 잊을 만하면 다시 인터넷에 등장해 조롱을 당한다. 극중 오세아닉 815편에 탑승했다가 조난당한 인물 중엔 한국인 권진수(대니얼 대 김)와 그의 아내 백선화(김윤진)도 있는데, 드라마는 종종 두 사람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플래시백으로 과거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때마다 한국인들은 실소를 참지 못한다. 선화와 진수가 결혼하는 장소가 일본풍으로 지어진 사찰인 것까지는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청계천 인도교보다도 작은 돌다리가 ‘한강대교’라고 이름표를 달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서울 묘사, 아무리 봐도 하와이 해변에서 찍은 흔적이 역력한 ‘경남 남해’ 시퀀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미스터리 드라마’였던 <로스트>의 장르는 ‘웃음참기 챌린지’로 둔갑한다.
물론 <로스트>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한국을 무시하려 했을 거라 의심할 이유는 없다. 선화와 진수의 러브 스토리는 팬들에게 ‘<로스트>의 심장’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절절한 스토리로 사랑받았는데, 한국을 무시할 의도가 있었다면 굳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들을 한국인으로 묘사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제작진은 ‘한국을 더 정확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즌2부터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크리스티나 킴을 고용하기도 했다. 선화를 연기한 김윤진 또한 제작 과정 내내 제작진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발견할 때마다 그를 정정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문제는 제작진의 선의와 한국계 작가, 한국인 배우의 적극적인 개입 및 의견 개진으로도 한국에 대한 무지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와이 안에서 대부분의 촬영이 이뤄진 <로스트> 제작진은, 한국을 묘사해야 할 때면 ‘최대한 동아시아 국가처럼 보이는 장소’를 찾아갔다. 그렇게 선택된 로케이션들이 호놀룰루 차이나타운이나 일본 이민자들이 세운 뵤도인(평등원) 사원 같은 곳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딴에 나름대로 ‘더 정확하게’ 그리려 했던 노력은 한국인에겐 쓴웃음으로 돌아왔다. 이 뻔한 스테레오 타입 어떻게 할 거야. 동북아시아 사람이라고 하면 무조건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고, 결혼식은 기와가 올라간 거대한 목조건물 앞에서 치르고….
갑자기 <로스트> 이야기를 꺼낸 건 문화방송(MBC) <나 혼자 산다> 때문이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인도인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의 일상을 따라간 418화 방송은, 유튜브 클립 영상으로 업로드되자마자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유튜브 사용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2021)에서 그가 연기한 파키스탄 출신 이주노동자 캐릭터 ‘알리 압둘’이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를 향한 관심과 사랑도 덩달아 뜨거워진 것이다. 그런데 아누팜 트리파티가 친구들을 위해 치킨커리를 만드는 클립 영상 아래, 미처 예상치 못한 댓글이 달렸다. 한참 혼자서 식재료를 손질하다 말고, 아누팜 트리파티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인 밥 딜런의 ‘미스터 탬버린 맨’을 틀고는 함께 흥얼거렸다. 그리고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아 최상단에 올라와 있는 댓글의 내용은 이랬다. “방송국에서 뻔한 스테레오 타입의 인도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 걸 알고, 중간에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트는 것 좀 봐.”
그도 그럴 것이, 아누팜 트리파티가 ‘미스터 탬버린 맨’을 틀기 직전까지 배경음악으로 깔렸던 노래들은 인도 영화 <엑 타 타이거>(2012)의 사운드트랙이었다. 요리 초반 평범하게 닭을 손질할 때만 해도 배경에 깔리는 노래는 마룬5의 노래 ‘왓 러버스 두’였지만, 그가 손질한 생닭 위에 플레인요거트를 뿌리며 본격적으로 인도식 요리법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배경음악은 <엑 타 타이거> 사운드트랙 ‘마샬라’와 ‘백투백’으로 이어졌다. 인도인이 인도 요리를 하는 영상에 인도 영화 사운드트랙을 까는 것에 악의가 있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댓글난의 인도인들과 남아시아 사용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한국인들이 영화 <세 얼간이>(2009) 좋아하는 건 고마운 일인데, 그 영화 사운드트랙도 시도 때도 없이 깔더라”, “동아시아 사람들이 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선입견이 가득한 건 팩트 아니야?”, “맨날 ‘인도’라고 하면 부정적인 영상만 보여주는 한국 방송사들이 그러면 그렇지”. 어떤 유저는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야, 그래도 ‘투낙 투낙 툰’(달러 멘디가 부른 펀자브팝 노래로, 한국에선 발음 때문에 ‘뚫훍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아닌 게 어디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 혼자 산다> 제작진의 악의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이날 방송은 오히려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타지에 와서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아누팜 트리파티에 대한 찬사로 가득했으니까. 그가 친구들을 위해 인도 요리를 하는 장면에서 ‘인도풍’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선곡한 것도, 나름대로는 그의 문화적 뿌리를 강조하려는 의도였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 미디어가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를 묘사할 때 익숙한 스테레오 타입에 의존하는 게 결례인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치 우리가 <로스트> 속 대형 사찰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일본풍으로 목례하는 ‘동양인 스테레오 타입’ 묘사를 보며 묘한 불쾌감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말이다.
한국처럼 ‘단일민족국가’라는 정체성이 강한 사회일수록, 선의를 가지고 더 다양한 문화권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손짓을 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오징어 게임>이 아누팜 트리파티를 캐스팅한 것도, 그런 아누팜 트리파티의 한국 생활에 <나 혼자 산다>가 발 빠르게 주목한 것도 모두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 본의 아니게 그의 출신지 시민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그들을 불쾌하게 만든다면, 그것 또한 비극 아닐까? 우리의 선의와 우정이 오역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이웃들에 대해 조금 더 성의 있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 스테레오 타입에 기반한 것이 아닌, 진짜 관계를 쌓아가기 위해.
이승한 _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