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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헤겔, 니가 왜 거기서 나와?…철학도 기자의 수능 국어 ‘멀미’

등록 2021-11-19 13:58수정 2021-11-21 09:07

수능 국어 최고난도 문제로 꼽힌 ‘헤겔 변증법 8번’
지문독해도, 선택지도 난해…고3 출제 적절했을까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강북종로학원 수능 분석 상황실에서 국어 선생님들이 시험 내용을 분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강북종로학원 수능 분석 상황실에서 국어 선생님들이 시험 내용을 분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학년도 수학능력시험에 ‘헤겔’이 떴다. 약 2000자 길이 지문에 6문제를 대동하고 나타나, 1교시 국어영역 2~3쪽을 맹폭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수능이 끝난 저녁 트위터는 수험생들의 절규와 저주로 가득 찼다. “헤겔 집주소 알려주세요. 저 진짜 멘탈이 안 잡혔어요.”(EN***********), “헤겔 죽어라, 이미 죽었지만 또 죽어라.”(Gl*******) 시험문제를 분석한 언론들도 일제히 ‘헤겔 변증법’ 지문을 국어영역 최고난도 문제로 꼽았다.

헤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은 독일 관념론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근대철학의 대부다. 그리운 이름을 곱씹으며 기자도 트윗을 날렸다. “수능 국어 시험지 다운받았습니다.” 기자는 2018년 서울의 한 대학에서 철학 전공으로 졸업장을 받았고, 2015년 2학기에는 ‘헤겔철학’이라는 수업을 수강하기도 했다. 잘하면 지문 건너뛰고 문제랑 선택지만 읽고 푸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6문제니까 10분이면 되겠지. 타이머를 맞췄다. 심호흡하고, 시작.

지문은 (가)와 (나) 두 편의 글로 구성돼 있다. 두 글은 헤겔의 변증법 논리학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미학관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드러낸다. (가)는 예술보다 종교, 종교보다 철학이 성숙한 진리 인식이라는 헤겔의 입장을 대변한다. 반면, (나)는 예술·종교·철학을 줄 세우는 헤겔의 미학적 위계가 줄 세우기의 기준이 되는 변증법 논리와 충돌한다고 비판한다.

지문 독해부터 쉽지 않다. “직관의 외면성 및 예술의 객관성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감각적 지각성인데, 이러한 핵심 요소가 그(헤겔)가 말하는 종합의 단계에서는 완전히 소거되고 만다.” 완전히 소거된 것은 내 ‘정신줄’이 아닐까. 철학 텍스트를 암호문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적’, ‘~성’이 붙은 개념어의 난립이다. 독해보다는 해독의 영역이다. 수험생 여러분은 본인의 문해력을 비관하기보다 부자연스러운 번역어에 의존해야 하는 학문 풍토를 탓해도 좋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위키미디어 코먼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위키미디어 코먼스

문제로 넘어가면 점입가경이다. 특히 3점이 배점된 8번. 신선한 형식과 지문보다 난해한 선지가 갈길 바쁜 수험자를 괴롭힌다. 헤겔과 ‘나’의 글쓴이가 나누는 가상 대화를 제시하고 글쓴이의 대답을 고르도록 한 문제다. 먼저 헤겔이 “괴테와 실러의 문학이 말년에 가서야 비로소 예술적으로 완성됐다며, 초기 작품은 지적으로 미성숙한 결과물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헤겔의 논리적 전제와 이를 적용한 결론이 모순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의 대답을 골라야 한다. 선택지를 보자.

①이론에서는 대립적 범주들의 종합을 이루어야 하는 세 번째 단계가 현실에서는 그 범주들을 중화한다. ②이론에서는 외면성에 대응하는 예술이 현실에서는 내면성을 바탕으로 하는 절대정신일 수 있다. ③이론에서는 반정립 단계에 위치하는 예술이 현실에서는 정립 단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④이론에서는… 아, 여기까지만 봐도 될 것 같다.

답은 2번이다.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던 기자의 과 후배 정아무개(28)씨는 “‘나’ 글쓴이는 ‘예술은 객관이 아닌 내면의 재객관화’라는 주장을 하고 싶어하는데, 괴테와 실러 작품이 좋아진 것 역시 같은 논리로 설명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설했다. 그러면서 “지문보다는 배경지식으로 풀었다. 너무 많은 철학 개념이 쓰여서 배경지식 차이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질 것 같다. 기본적으로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 중인 이아무개(28)씨도 “글만 읽고도 풀 수 있게 나온다고 하지만 철학 용어들 때문에 멀미나서 글이 읽히지 않을 것 같다”고 평했다. 전공자가 보기에도 헤겔 관련 배경지식이 없으면 풀기 어려웠단 얘기다.

10분 타이머를 맞췄던 기자는 18분을 썼다. 8번은 틀렸고 나머지는 맞혔다. 8번을 맞힌 학생에게는 진지하게 철학과 진학을 권한다. 대신 나중에 졸업장 받고 원망하기 없기. 헤겔은 철학과에서도 이른바 ‘3H’로 악명 높다. 현상학의 후설, <존재와 시간>의 하이데거, 그리고 헤겔이다. 성적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3H는 피해야 한다. 수험생 여러분의 말이 맞다. 헤겔(혹은 평가원)이 잘못했다. 아울러 이 짧은 글 탓에 기자가 철학도 대표처럼 비쳤다면 죄송하다. 이제 전공에 대해 함구하고 살기로 했다. 기자를 굴복시킨 이 지문은 열여덟 고3이 풀기에 적절한 출제였을까. 그 대답은 한 고등학교 국어교사의 트윗으로 갈음한다.

“제발 학교 출근했을 때 수능 비문학 풀고서 헤겔 설명해달라고 안 했으면ㅠㅠ”(li*************)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2022학년도 수능 국어(홀수형) 4~9번 지문 전문

(가)

정립-반정립-종합. 변증법의 논리적 구조를 일컫는 말이다. 변증법에 따라 철학적 논증을 수행한 인물로는 단연 헤겔이 거명된다. 변증법은 대등한 위상을 지니는 세 범주의 병렬이 아니라, 대립적인 두 범주가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어 가는 수렴적 상향성을 구조적 특징으로 한다. 헤겔에게서 변증법은 논증의 방식임을 넘어, 논증 대상 자체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즉 세계의 근원적 질서인 ‘이념’의 내적 구조도, 이념이 시ㆍ공간적 현실로서 드러나는 방식도 변증법적이기에, 이념과 현실은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이 두 차원의 원리를 밝히는 철학적 논증도 변증법적 체계성을 지녀야 한다.

헤겔은 미학도 철저히 변증법적으로 구성된 체계 안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에게서 미학의 대상인 예술은 종교, 철학과 마찬가지로 ‘절대정신’의 한 형태이다. 절대정신은 절대적 진리인 ‘이념’을 인식하는 인간 정신의 영역을 가리킨다. 예술ㆍ종교ㆍ철학은 절대적 진리를 동일한 내용으로 하며, 다만 인식 형식의 차이에 따라 구분된다. 절대정신의 세 형태에 각각 대응하는 형식은 직관ㆍ표상ㆍ사유이다. ‘직관’은 주어진 물질적 대상을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지성이고, ‘표상’은 물질적 대상의 유무와 무관하게 내면에서 심상을 떠올리는 지성이며, ‘사유’는 대상을 개념을 통해 파악하는 순수한 논리적 지성이다. 이에 세 형태는 각각 ‘직관하는 절대정신’, ‘표상하는 절대정신’, ‘사유하는 절대정신’으로 규정된다. 헤겔에 따르면 직관의 외면성과 표상의 내면성은 사유에서 종합되고, 이에 맞춰 예술의 객관성과 종교의 주관성은 철학에서 종합된다.

형식 간의 차이로 인해 내용의 인식 수준에는 중대한 차이가 발생한다. 헤겔에게서 절대정신의 내용인 절대적 진리는 본질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예술은 직관하고 종교는 표상하며 철학은 사유하기에, 이 세 형태 간에는 단계적 등급이 매겨진다. 즉 예술은 초보 단계의, 종교는 성장단계의, 철학은 완숙 단계의 절대정신이다. 이에 따라 예술-종교-철학 순의 진행에서 명실상부한 절대정신은 최고의 지성에 의거하는 것, 즉 철학뿐이며, 예술이 절대정신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지성이 미발달된 머나먼 과거로 한정된다.

(나)

변증법의 매력은 ‘종합’에 있다. 종합의 범주는 두 대립적 범주 중 하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도 안 되고, 두 범주의 고유한 본질적 규정이 소멸되는 중화 상태로 나타나도 안 된다. 종합은 양자의 본질적 규정이 유기적 조화를 이루어 질적으로 고양된 최상의 범주가 생성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헤겔이 강조한 변증법의 탁월성도 바로 이것이다. 그러기에 변증법의 원칙에 최적화된 엄밀하고도 정합적인 학문 체계를 조탁하는 것이 바로 그의 철학적 기획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가 내놓은 성과물들은 과연 그 기획을 어떤 흠결도 없이 완수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미학에 관한 한 ‘그렇다’는 답변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성의 형식을 직관-표상-사유 순으로 구성하고 이에 맞춰 절대정신을 예술-종교-철학 순으로 편성한 전략은 외관상으로는 변증법 모델에 따른 전형적 구성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질적 내용을 보면 직관으로부터 사유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외면성이 점차 지워지고 내면성이 점증적으로 강화ㆍ완성되고 있음이, 예술로부터 철학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객관성이 점차 지워지고 주관성이 점증적으로 강화ㆍ완성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날 뿐, 진정한 변증법적 종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직관의 외면성 및 예술의 객관성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감각적 지각성인데, 이러한 핵심 요소가 그가 말하는 종합의 단계에서는 완전히 소거되고 만다.

변증법에 충실하려면 헤겔은 철학에서 성취된 완전한 주관성이 재객관화되는 단계의 절대정신을 추가했어야 할 것이다. 예술은 ‘철학 이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이다. 실제로 많은 예술 작품은 ‘사유’를 매개로 해서만 설명되지 않는가. 게다가 이는 누구보다도 풍부한 예술적 체험을 한 헤겔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방법과 철학 체계 간의 이러한 불일치는 더욱 아쉬움을 준다.

2022학년도 수능 국어(홀수형) 8번 문제.
2022학년도 수능 국어(홀수형) 8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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