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 소설 , 드라마 , 영화 , 연극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 ’를 즐긴다 . 꼽아 보면 남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가 가장 많다 . 그런데 이야기를 끌어가는 또 하나의 강력한 동력은 부모의 원한이다 . 어린 시절의 , 심지어 기억도 하지 못하는 엄마와 아빠의 원한을 잊지 않고 절치부심 , 끝내 원수를 갚고야 마는 주인공들이 엄청 많다 . 부모와 함께 치욕을 겪고 , 험한 일을 함께 당한 경우는 공동의 원수이니 복수가 당연할 수도 있지 . 그런데
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도 원수에게 부들부들 떨면서 단죄의 칼을 꽂고 총도 쏜다 . 물론 , 부모가 없어서 당하는 부당한 대우와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처하게 되는 곤궁함이 분노의 배경이 되니까 상황이 납득이 되기는 한다 . 자신을 핍박하던 적이 부모의 원수이면 복수의 통쾌함은 더 커진다 . 하지만 남들이 들려준 이야기로만 알게 된 사연에 노여워하고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부모라는 사실만으로 유대감이 충만해지는 장면을 만나면 고개를 갸웃한다 .
아이는 아빠와 엄마의 생식세포 속에 있는 유전자를 물려받는다 . 하지만 엄마와 연결된 탯줄이 끊어지면 물리적인 연결은 완전히 끊긴다 . 무엇이 부모와 자식을 연결해서 강한 유대가 만들어지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 생김새나 성질머리가 닮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닮은 사람은 찾을 수 있지 않던가 ?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 ? 글쎄 , 혈액형이 같으면 다른 사람의 피도 수혈받을 수 있지만 , 혈액형이 다르면 부모의 피도 수혈받지 못한다 . 혹시 디엔에이 (DNA)가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과 같은 끈으로 연결이라도 해놓았을까 ? 그런 끈을 발견하지 못했던 과학자들이 군집이나 사회를 이루는 생물들의 이타적 행위를 해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 자신의 무리를 위해서 희생하는 개미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과 같은 유전자를 번성하게 한다는 설명을 하는데 , 약간 옹색하다 .
<남남 >은 남이고 싶지만 남일 수 없는 모녀 사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남인데 남이 아닌 친구 , 애인 , 엄마 친구 , 직장 동료들이 티격태격 , 때론 기대어 사는 모습을 그린다 . 고등학교 때 진희를 낳은 엄마는 물리치료사 , 진희는 디자이너 . 엄마가 일하는 병원 원장은 쪼잔하고 진희와 일하는 팀장은 진희를 좋아한다 . 하지만 진희 타입은 아니다 . 엄마의 베프는 진희랑 더 친하고 진희의 베프는 동성 애인이 바뀔 때마다 자기 얘기만 쏟아내기 일쑤다 . 엄마는 자위하다 딸에게 들키고 딸은 엄마에게 데이트 앱 사용법을 알려준다 .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속으로만 하는 말들이 오간다 . “내 딸이지만 가끔 미친 것 같아 .” “아무런 대책이 없어 , 나라도 정신 차려야지 .” 가족 안에 짜인 위계가 없고 , 희생이나 강요 , 일방적인 기대도 없다 .
진희가 엄마의 원한을 알게 되면 바들바들 , 복수를 다짐할까 ? 엄마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떠났던 진희의 유전적 아빠가 갑자기 엄마의 남자친구가 되어 등장한다 . 진희는 집에까지 드나드는 아빠를 보면서 “존나 어이가 없다 .” 거의 삼십년이 흘러 딸의 존재를 알게 된 아빠는 진희를 진희씨라고 부른다 . 아빠가 있었다고 진희가 왕족이나 재벌이 되는 것도 아니어서 그런가 ,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도 않는다 . 엄마도 떠났던 남친에게 한을 쌓아놓지 않았다 . 엄마랑 쿨하게 지낸 삼십년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 가끔 놀라는 일은 있어도 울고 , 짜고 , 매달리진 않을 시간들 . 클리셰를 벗어났는데, 이게 재밌다.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