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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빈곤한 할머니들’의 삶은 정치화되지 않는다

등록 2021-12-11 15:44수정 2021-12-11 16:13

[한겨레S] 이라영의 비평
빈곤의 여성화

‘할매니얼’ 열광 이면에 숨어 있는
평범한 노년 여성의 가난과 고독
희생이 성역할로 고정돼버린 이들
‘빈곤의 할머니화’에 주목해야
‘할매니얼’에 대한 문화적 열광 이면에 숨은 빈곤한 노년층 여성의 삶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할매니얼’에 대한 문화적 열광 이면에 숨은 빈곤한 노년층 여성의 삶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영화 <미나리>로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미국에서 열린 한국 특파원 기자회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남성 기자가 윤여정에게 “케이(K)할머니라는 브랜드, 미국에 많이 알리게 된 계기”라며 국민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에게는 나이 많은 한 여성 배우(혹은 극중 순자)가 한국이 수출하는 브랜드 정도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케이를 붙이고 붙이다 이제는 케이할머니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데 케이할머니는 누구인가. 배우 윤여정인가 극중 순자인가.

할매니얼 이면의 쓸쓸함

이제 케이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의 상징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면서 케이는 더욱 자랑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여기저기에 케이를 붙인다. ‘코리아 그랜마’, 케이할머니에게 세계가 열광하고 케이할머니들이 인기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들의 인기는 배우 윤여정만이 아니다. 걸쭉한 입담에 솔직한 매력을 보여주는 유튜버 박막례, 세련된 패션 감각과 열린 생각을 보여주는 ‘밀라논나’ 장명숙 등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할머니들의 등장은 할머니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분명히 긍정적이다.

남성 청년들이 ‘~한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하진 않지만 여성 청년들은 ‘~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젊은 여성들이 새로운 할머니상에 더욱 열광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우리 현실에서 이런 할머니들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할머니에 대한 재현 방식도 다양하지 않았다. 그동안 할머니에 대한 이미지는 욕쟁이 할머니, 꼬부랑 할머니, 전국적으로 셀 수 없는 원조 할머니, 혹은 폐지 줍는 할머니 등 어떤 전형성이 있었다. 아는 것은 많지 않지만 음식 솜씨 좋고, 희생하고 포용적이며 따뜻한 할머니가 최선의 재현이었다. 동화 속의 마귀할멈처럼 ‘늙은 여자’에 대한 재현 방식은 노인 혐오와 여성 혐오의 협업을 보여주는 장이었다. 그러니 개성 있고 자기 할 말을 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충분히 반길 만하다. 여성의 나이 듦을 긍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성차별적 문화에 대한 도전에 해당한다.

할머니에 대한 책도 지난 몇년 사이 급증했다. 출판계만이 아니라 패션과 외식 산업 등에서도 ‘할머니’는 그야말로 ‘힙’하다. 시장은 빠르게 움직인다. 할머니와 밀레니얼의 합성어인 ‘할매니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할머니들의 패션과 입맛 등은 할매 감성이라 불리며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할머니에 대한 환호에는 젊은 여성들의 미래에 대한 소망도 반영된다.

이러한 의미 있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할머니에 대한 문화적 소비를 마냥 긍정하긴 어렵다. 시장에서 소비되는 감성과는 달리 많은 할머니들의 삶은 우리 사회의 빈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빈곤의 여성화는 빈곤의 할머니화가 되었다. 미래에 ‘~한 할머니’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현재의 여성 노인 빈곤에 대한 불안을 보여준다.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소망에는 가난과 질병,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보수 언론에서는 줄곧 종합부동산세를 비판하며 ‘은퇴 후 집 한채와 약간의 재산밖에 없다’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종부세를 내는 상위 2%가 졸지에 세금 ‘폭탄’을 맞는다고 그야말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은퇴’할 수 있는 삶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경우다. 가난한 노인에겐 은퇴라는 게 없다. 그들은 일자리가 없으면 일흔이 넘어서도 스스로를 ‘백수’라 한다. 은퇴는 특정 계층의 언어이며 주로 남성 노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언어다.

1970년대 미국의 사회학자 다이애나 피어스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빈곤의 여성화’라는 개념은 1990년대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빈곤의 여성화 경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20여년이 흘렀다. 빈곤의 여성화는 빈곤의 여성 노인화, 곧 빈곤의 할머니화로 진행되고 있다. 차별적 고용, 임금 격차, 모성 페널티, 성폭력 등으로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차별받고 생애 내내 남성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하다.

경제적 약자인 여성과 노인은 주거취약계층이 되기 쉽기에 오늘날 기후위기로 인한 빈곤도 여성일수록, 노인일수록 더욱 영향을 받는다. 전업주부의 경우 연금에 가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이들은 돌봄받는 입장이기보다는 최소한 손자들을 돌보며 자식의 경제 활동에 도움을 준다. 요양보호사의 평균 연령은 점점 높아져서 60살에 가깝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2019 장기요양 실태조사’에 따르면 요양보호사의 평균 연령은 58.7살로, 이 가운데 60대가 40.4%를 차지한다. 성별은 대부분 여성이다(94.7%). 할머니들은 평생 누군가를 돌보고 살았지만, 정작 자신은 가장 돌봄받지 못한 채 저임금으로 불안정한 노동을 한다.

코로나19, 더 가난해진 노년 여성

코로나19는 여성과 노인을 경제적으로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달에 발간한 보고서 ‘최근 분배 현황과 정책적 시사점’에 따르면 여성 가구주 노년세대는 세명 중 두명이 빈곤 상태이다. 이는 남성 가구주 노년세대 빈곤율의 두배가 넘는다.

흔히 고령화 사회 문제를 들여다볼 때, 노인의 삶의 질보다는 이 노인들을 부양할 청장년층의 부담을 걱정한다. 늙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관심 없이 출생률에만 관심을 보인다. 결국 고령화 사회 문제 해소 방안은 새로운 인간을 빨리 낳으라고 재촉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렇기에 전통적 성역할에서 이탈하려는 청년 여성에 대한 공격이 극심해지는 반면 청년 남성의 목소리는 과대대표된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고용, 소득, 기업실적, 자산 등 다방면에 걸쳐 일부 고소득층과 빈곤층의 격차가 극심해지는 케이(K)자형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브랜드로서의 케이할머니가 아니라 케이자형 양극화 사회에서 노인과 여성이 처한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대선 후보들도 노인이 되겠지만 그들은 할머니의 삶을 쳐다보지 않는다. 희생이 ‘성역할’로 여겨지는 이들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덜 정치화한다. 청년, 정확히는 ‘이대남’이라 호명하는 남성 청년에게 정치적 구애를 하며 서로를 ‘형’이라 부르는 형님 정치(석열이 형, 준석이 형, 준표 형 등)가 만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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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회학자.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2020) <타락한 저항>(2019) 등의 저자. 사회의 구석구석을 비평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비평의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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