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누리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 앉아 있다. 책상 위에 김 교수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진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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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당함의 뿌리는 무엇일까. “얼마 전부터 의사, 판사, 검사들, 그러니까 대한민국 ‘전교 일등들’이 보인 행태는 한국 교육이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파탄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한국의 공영방송은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국민을 성숙한 시민이 아니라 바보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은 군사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사회가 아니라, 자본독재로 이행한 사회입니다.” 이런 촌철살인식 ‘사이다 발언’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내는 사람. 권력의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어떤 언론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런 당당함을 애써 멋지게 포장하지도 않는 담백함까지 지닌 사람, 그가 김누리 교수다. ‘대학입시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입시를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그러나 너무도 이상적인 제안으로 수많은 청중을 감동시킨 사람. 돈 때문에 배움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회, 대학에서 취업의 기술이 아니라 진짜 학문을 가르치는 사회를 다시 처음부터 꿈꾸게 해준 사람. 그가 바로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문학과)다.
‘교수’라는 직함은 사람을 사람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지게 만드는 이상한 힘을 지녔다. ‘교수님’이라 부르는 순간 친근한 느낌은 사라져버리고 권위와 불편함과 어색함이 자리잡는다. 그만큼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교수님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교수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가 교수임을 자꾸 잊어버린다. 그에게 무엇이든 물어보라. 대답을 망설이는 경우가 없다. 그는 지나치게 꾸밈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해서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 당황스러움은 거부감이 아니라 신선한 충격이다. 그는 직설화법으로, 아무런 포장 없이 날것의 진실을 말한다. 이런 시원시원함, 이런 격의 없음, 이런 푸근함이 내가 ‘살롱드여울’에서 꿈꾸는 분위기였기에 인터뷰는 흥미진진했고, 박진감 넘쳤다.
라이피즘이란 삶답지 못하게 하는 것과의 끝없는 싸움
―교수님, 반갑습니다. 신간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를 읽으며 유독 어머님의 편지가 가슴 찡하게 다가왔어요. 군대 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문장을 쓰는 어머님이라면, 분명 드라마틱한 성장과정을 거치셨으리라 짐작되는데요. “때론 시련이 큰 그릇을 만든다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은 작은 그릇마저 찌그러뜨리기 일쑤란다.” 40여년 전에 쓰신 어머님의 문장이 제 마음을 아프게 찔렀어요.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분노를 인터넷으로 표현하는 데 지쳐버린 우리의 나약한 자아야말로 ‘찌그러진 작은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편지를 군대 간 아들에게 보낸 어머니는 정말 자식을 ‘담대한 그릇’으로 키우셨겠구나 싶었어요.
“어머니는 제 모든 공부와 글쓰기의 뿌리이지요. 어머니는 실향민이셨죠. 1940년대 말 홀로 고향인 함경북도 경성에서 서울로 내려오신 뒤, 평생 단 한 명의 친척도 만나지 못하셨어요. 젊은 여성 혼자서 사랑하는 남자 하나만 믿고 서울로 유학을 온 것인데, 유학을 허락해준 외할아버지도 대단하시고, 요구했던 어머니도 용감하셨지요. 하지만 그 용감함의 대가는 쓰라렸어요. 단 한 번도 외가의 소식을 듣지 못하셨지요. 이산가족 찾기도 시도해봤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어요. 하지만 놀랍게도 어머니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요. 사무치게 그리우셨을 텐데,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셨지요. 마지막 임종 때 딱 한 마디 하셨지요. “엄마!” 하고 부르시며 세상을 떠나셨어요. 엄마의 엄마를, 딱 한 번 부르시고 가셨습니다. 그 슬픔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지만, 힘든 내색을 안 하셨지요. 갓 스물 넘긴 여성이 혈혈단신 낯선 고장으로 왔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분명 며칠 전까지 하나였던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북에 있는 가족과 영영 이별이었죠. 그 상황에서 결혼하고, 아이 셋을 낳고, 팔십 평생 그 어떤 가족의 흔적도 찾지 못하셨지요. 하지만 삼형제를 키우실 때 어머니는 항상 당차고 강인하셨고, 아버지가 감옥에 가셨을 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지요. 어머니는 저희를 ‘괴테의 문장’으로 키우셨어요. 제가 과음을 한 날이면, 어김없이 책상 위에 이렇게 쓰인 쪽지를 놓아두셨지요. “인생의 절반을 술과 담배로 탕진하려느냐”(괴테). 노년에 제가 성경책을 선물하면서 종교를 가져보시라고 권했는데, 다 읽어보시더니 ‘난 필요 없다, 괴테로 충분하다’고 하셨어요. 그 순간 정말 기뻤고, 어머니가 자랑스러웠죠.”
―어머니가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순간, 아들 앞에서 행여 눈물을 보일까봐 아예 말씀을 안 하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머니 이야기를 하실 때, 교수님 얼굴에 시종일관 환한 미소가 피어올라요. 슬픔으로 가득한 삶을 사셨지만, 끝내 환한 미소로 남으신 분이네요. 아버지는 어떠셨는지요.
“아버지는 평생 엄청난 고민거리를 안겨주셨지요.(웃음) 아버지는 뼛속 깊은 사회주의자였어요.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지요. 30대에 선거에 나와 ‘나는 평생 재산을 갖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매우 고지식한 분이라 그 약속을 지키셨거든요. 그 덕에 어머니가 평생 고생하셨죠.(웃음) 국제적으로는 꽤 알려진 정치가였어요.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와 스웨덴 총리 올로프 팔메가 제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열심히 했지요. 아무튼 아버지 덕에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우리 삼형제는 결핍을 몰랐고 불안도 몰랐어요. 어머니의 힘이었죠. 하지만 그때는 원망스러웠던 아버지의 말이 제가 지금까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힘이 되었어요. 아버진 말씀하셨죠. 누리야, 될 수 있으면 생활수준을 높이지 말아라! 너무 황당했어요. 이렇게 가난한데 도대체 어떻게 더 가난해지란 말인가.(웃음) 하지만 아버지 말씀의 의미를 이젠 알아요. 생활수준을 한번 높여 놓으면, 그것을 내리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그러면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되는 거지요. 전 가난이 그다지 두렵지 않아요. 가난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방법을 자연스레 익힌 거지요.”
2. 김누리 교수가 자신의 책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에 사인해주고 있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비결은 항상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문학과 철학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르쳐준 길이었다. 평생 괴테의 작품을 성경처럼 품고 다니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책을 읽으셨다는 어머니를 향한 깊은 사랑이 지금의 낭만과 열정과 유머를 동시에 갖춘 따스한 사람 김누리를 낳았다.
―부모님의 러브스토리도 낭만적이지만, 교수님의 결혼은 더 드라마틱할 것 같은데요?
“만나자마자 이 사람이라는 느낌이 와서 그날 바로 결혼하자고 했어요. 우리가 혁명은 실패했으니까 결혼만이라도 혁명적으로 하자, 친구들이랑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결혼만은 결코 이것저것 재지 않고, 직진하고 싶었어요. 내 아내도 나처럼 ‘정신없는’ 사람이라(웃음), 일주일 만에 오케이했어요.”
―어떻게 만나자마자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왔나요?
“나도 몰라요.(웃음) 그냥 ‘안무티히, 쇠네 젤레’라는 느낌이 왔어요.”
나는 그 순간 내 귀에 들리는 그 달콤한 독일어 형용사에 뭉클해졌다. ‘안무티히(anmutig), 쇠네 젤레(schöne Seele)’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의미의 독일어다. 누군가를 처음 본 순간 그의 가장 순수하게 빛나는 어떤 본질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 아닐까.
―결혼식은요?
“주머니에 만오천원이 있길래, 그걸로 14케이 반지 하나 만들어 끼워주고, 성당 가서 나 혼자 주례도 서고 서약도 하고, 우리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어요.”
―일반적인 결혼식은 전혀 안 하셨어요?
“나중에 어쩔 수 없이 했죠. 너무 가난해서 유학비 마련하려고. 그날 모인 축의금으로 유학생활을 시작했지요. 하하.”
그는 격의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열등감과 불안과 예의 차림이 없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나치게 편안해졌다가, 마침내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다니’ 하며 깜짝 놀라게 된다. 그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순간은 그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이다 발언이지만, 그를 진정 좋아하게 되는 순간은 오랜 시간 갈고닦은 학문적 성취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속 깊은 발언 때문이다. “지금의 품위 있고 성숙한 민주주의를 갖춘 독일을 만든 사람은 테오도어 아도르노, 빌리 브란트, 그리고 프랑크푸르트학파, 그리고 작가 귄터 그라스예요.” 자신에게조차 차디찬 비판의 화살을 쏘아대는 그 놀라운 비판적 지성이 지금의 독일을 만들었다는 것, 독일 민주주의의 뿌리에는 항상 문학과 철학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이 숨쉬고 있다. 김누리의 전공은 독문학이지만 강연 주제는 교육문제에서부터 남북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광범위하다. 그의 학문적 성취에 감동을 받는 것이 나의 ‘이성’이라면, 복잡한 애증과 양가감정이 섞인 ‘아버지’를 향한 그의 발언은 나의 ‘심장’을 움직여 가슴 뭉클한 순간을 선물한다.
나약한 자아, 오만한 엘리트, 풍요로부터 해방될 것
―<당산 김철 전집>, 그러니까 교수님 아버님의 전집 분량이 엄청난데요. 김철 선생은 1950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특파원이었고, 1961년 통일사회당을 창당하고, 5·16 쿠데타로 망명생활을 시작했고, 1971년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습니다.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두 번이나 구속수감되셨지만 해외 유력 인사들이 김철 선생의 구명운동에 나서서 다행히 풀려나셨지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언제든 환하게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교수님이 그토록 바쁜 와중에도 꼼꼼히 아버지의 전집을 만드실 수 있을 정도의 조용하고도 복잡한 열정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가요.(웃음) 아버지의 전집을 만들게 된 것은 우연이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창고를 정리하다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발견했어요. 군사독재 시대에 공포 분위기 때문에 출판사를 구할 수 없었다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꼭 출판해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역사학자인 이만열 교수님이 ‘현대사의 중요한 사료이니 전집으로 출판하면 좋겠다’고 권유하셔서 일기, 칼럼, 기고문 등을 더 모아 전집을 내게 된 거지요.”
―그 시절에 비하면 많이 민주화되었지만, 지금은 ‘풍요를 향한 과도한 갈망’과 ‘내 안의 파시즘’이 한국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맞아요.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특히 엘리트들의 타락은 심각합니다. 공공병원 확충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데모, 양승태의 사법농단에 관여한 판사들에 대한 사법부의 연속된 무죄판결, 향응 접대를 받은 검사들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 처분 등의 행태를 보세요. 한국 교육이 길러낸 최고의 엘리트들이 이렇게 오만하다는 것은 한국 교육이 망했다는 증거예요. 그러나 어찌 보면 이 엘리트들도 한국 교육의 피해자입니다. 좋은 성품과 성숙한 의식을 가질 수 없도록,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만을 유리하게 이끌어온 것이 한국 교육이니까요. 공부 잘하면 모든 걸 용서해주는 잘못된 문화가 미성숙한 엘리트들을 만든 거예요. 대한민국 학계도 문제지요. 한번도 진정한 과거청산이 없었죠. 68혁명 같은 권위주의의 척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죠. 우리 모두가 ‘내 안의 파시즘’을 들여다봐야 해요.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유리천장지수가 가장 높죠. 남녀 간 임금차별도 심해요. 저도 제 안의 파시즘과 싸웁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려고 하지요. 제가 주장하는 라이피즘(lifism)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극복이지만, 특히 물질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우리 사회는 풍요라는 덫에 걸려버린 것 같습니다. 풍요를 갈망할 것이 아니라 풍요 자체로부터의 해방을 꿈꿔야 합니다.”
―‘내 안의 파시즘’과의 싸움, ‘내 안의 물질적 탐욕’과의 싸움이야말로 라이피즘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교수님이 학생들을 교육하는 방법도 궁금합니다. 아무리 진짜 학문을 가르치려 해도, 이미 학생들이 20년간 제도교육의 익숙한 경쟁에 찌들어 있을 텐데 어떻게 새로운 교육을 할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읽고, 쓰고, 배운 것을 이야기하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처음엔 어렵죠. 그런데 한 학기 정도 지나면 맨날 ‘우리 뭐 먹지, 뭐 사지, 뭐 하고 놀지?’라는 이야기만 했던 대학생들이 ‘야, 베냐민이 그러는데, 아도르노가 그러는데’ 하고 대화를 합니다.(웃음) 참 뿌듯해요. 꾸준히 읽고 토론하면 어느덧 대화의 주제가 바뀌고, 대화가 바뀌면 일상이 바뀌고, 일상이 바뀌면 미래가 바뀝니다. 배움이란 그런 것이죠. 그것이 우리에게 인문학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졸업논문을 실제로 자기 힘으로 쓰게 만드는 수업을 했어요.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열과 성의를 다해 논문을 다 쓰고 나면 우리 과의 축제가 벌어져요. 그 순간이 정말 뿌듯해요. 인문학의 위기란 없습니다. 인간의 위기가 있을 뿐이지요. 국가에 구걸하는 인문학, 시장에 구애하는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을 구제하는 인문학을 해야 할 때입니다.”
3. 김누리 교수가 자신이 쓴 책들을 들어 보이고 있다.
경쟁과 억압에 찌든 삶 바꾸려는 투쟁이 일상인 학자
그 어떤 열등감도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풍요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가짜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소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대학입시를 폐지하고 대학을 진정한 학문추구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그의 주장은 결코 낭만이나 이상주의가 아니라, 경쟁과 억압으로 찌든 우리 삶을 삶답게 만들려는 투쟁이다. 김누리가 제창하는 라이피즘은 인간, 사회, 자연을 파괴하는 안티라이프(anti-life) 체제인 자본주의에 맞서 생명과 공존과 평등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연대를 지향한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속의 문장을 빌리면, 역사는 그저 승자의 발자취가 아니라 ‘잘 진 싸움의 궤적’이며, 이 세상이 완전한 지옥이 되지 않은 것은 지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그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부서지면서도 끝내 지켜온 희망 때문이니까. 라이피즘은 삶을 삶답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과의 끝없는 싸움이니까. 삶이 아닌 것은 단 한 순간도 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 거기서 라이피즘은 시작된다.
작가. 개성 넘치는 존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꿈과 일상과 배움의 열정을 나누는 곳, 그곳이 바로 살롱이지요. 작가 정여울이 이 시대의 빛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속 깊은 정담을 나누는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