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비 작가가 부산 수영동을 기록하는 프로젝트에서 그렸던 ‘우물’ 그림. 그림 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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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은 두려움이었나, 기억나진 않는다. 그러면 서른에 그 두려움은 해소되었나, 명확하지 않지만 내 앞에 해답은 있었다고 믿어왔다. 지금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지만, 나는 그 흔들림마저 믿음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십대들이 스물을 흉내 내고 서른이나 마흔의 우리가 스물의 자신을 그리워하는 걸 보면, 한 인간에게 ‘청년’이란 의미는 꽤 광범위한 자장으로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쉰이나 예순의 우리까지 까마득한 스물 시절과 제대로 결별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인간은 평생 청년으로 살거나 꿈꾸다가 죽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퀴어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개인적 혼란이나 사회적 억압을 들어내고 나면, 우리에게도 똑같은 ‘청년’이 남는다. 비퀴어 청년들에게도 개인적 혼란이나 사회적 억압이 있을 테지만, 퀴어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사회를 거대한 바다나 호수쯤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전적으로 비퀴어의 시선으로나 가능한 비유일 것이다. 성소수자인 누군가에게, 퀴어 청년이나 청소년들에게 이 사회는 바다나 호수는커녕 작은 우물 하나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 우물에 퀴어 당사자들이 빠졌든 비퀴어들이 빠졌든 차이는 없다. 우물 안에 갇혔거나, 갇힌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거나, 어쨌거나 우리는 우물 근처일 테니 말이다.
‘세상이 달라졌잖아, 너희들도 다른 꿈을 꿔!’라는 태도가 무책임하고 폭력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자리가 어쨌거나 우물 밖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욕망이나 고독은 문 밖을 나서면 어디서든 어렵지 않게 그 위안을 얻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차마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선 또 많은 결심과 불이익을 각오해야 할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잖아? 극복해 나아가야지’라고 말한다면, 힘겹게 나섰던 마음마저 움츠러들 것이다. 바다도, 호수도, 우물도 아닌, 그저 시간 앞에 선 평등한 고독이어야 당연한데, 잘못 끼워진 첫 단추 때문에 격차는 불가피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공정’을 논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 공정 역시 퀴어에겐 다른 차원으로 기울어진 또 다른 비탈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싸움으로 이제 조금씩 퀴어의 시민권을 논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 논의조차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현실은 우리의 진보와 발전의 길고 긴 미완을 증명한다. 지금도 여기저기 정치의 유불리를 따져 ‘청년’을 호명하면서도 ‘퀴어 청년’의 삶은 완벽히 모르는 체하는 이중적 태도는 그들의 미래 역시 또 다른 미완을 쌓겠다는 자백일 것이다. 나는 그 역시 이 시대 청년들을 오독하고 모독하는 구시대의 비굴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해 가을 부산에서 부산 청년단체 ‘레코드 노이즈’와 진행했던 글쓰기 워크숍 ‘에세이 마라톤’의 장면. 부산문화재단 제공
제 몫의 존중은 지키려 하는
지금 청년과 청소년들에게
퀴어의 시민권은 길고 긴 미완
구시대의 억압에 갇히진 말자
퀴어인 스무살의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게 뭘까 생각하면, 역시 ‘안정’이나 ‘안심’이었던 것 같다. 퀴어라서 느낄 수밖에 없던 억압과 불안 탓도 있겠지만, ‘뭐 해서 먹고살지’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나에게도 마땅치 않았다. 당시에는 반드시 여성이거나 남성이어야 사람 대접을 받는 시대였으니, 남자도 여자도 아닌 채로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결국 돈인데, 나 역시 돈만으로 안정이나 안심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게 사실이었고, 그걸 철이 없었다거나 생각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다. 비싼 차를 몰거나 좋은 집에 살며 자신감을 얻어 어쨌든 이익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게 현실이니, 전혀 헛된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십을 넘겨 살아보니 한달 2천만원을 버는 삶이 200만원의 삶보다 반드시 ‘열배’의 안정이거나 안심인 것만은 아닌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달라지긴 한다. 우리의 현재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먹는 것, 보는 것, 입는 것, 사는 것부터가 모두 달라질 테니 말이다. 서는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 달라진 풍경이란 그저 다른 것일 뿐, 까마득한 삶의 격차를 실증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수십배의 격차로 불어난 건 불안이나 박탈감 따위가 아닐까? 나는 돈일 필요 없는 인간의 면면까지 돈으로 만드는 게, 우리가 사는 여기 이 사회의 이상은 아니라고 믿는다.
퀴어에게 새로운 시대란 어떤 의미일까? 퀴어 청년이나 청소년의 안정, 안심을 위해, 미래는 어떤 풍경이어야 하는 걸까? 해답은 간단하다. 지금도 국회 앞에서 제대로 된 첫 단추가 될 그 법의 필요성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외치고 있다. 미래 세대의 주인인 청년들은 그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을까? 그 어느 세대보다 공정 감각과 존중의 의미를 깨칠 수밖에 없는 그들은, 부당하고 불합리한 어떤 억압을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 걸까?
아니, 어쩌면 지금의 나 역시 버릇처럼 회의적이기만 한, 어쩔 수 없는 ‘구시대’의 낡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퀴어든 퀴어가 아니든 이미 현시대의 청년이나 청소년들은 타자를 향한 제 몫의 존중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를 지닌 채인지도 모른다. 나도 할 수 있는 걸 당연히 그들도 할 수 있어야지, 내 선택이 존중받은 만큼 그들의 선택도 존중되어야지, 이 간단하고 당연한 해답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니, 그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건지도. 모두가 퀴어이거나, 누구도 퀴어일 필요 없는 그런 시대를 위해.
지난 한해, 몇차례 부산과 서울에서 청년들과의 글쓰기 프로그램에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퀴어일 수도 있고, 퀴어가 아니기도 했다.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일에, 글을 매개로 서로 다른 사유를 나누고 위로를 공유하는 일에, 굳이 서로의 정체성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에서도 적지 못했던 퀴어 당사자로서의 설렘에 관한 이야기도, 어렸을 때부터 프로레슬링을 좋아했던 마니아로서의 즐거움도, 도대체 왜 어디에도 제대로 적히지 않았던 건지 알 수 없는 생리하는 몸과 싸운 이야기도, 모두 청년의 이야기였고, 여기 스물이나 서른 즈음을 지나는 청년들의 현재였다.
스물이나 서른을 지나 오십이 되었다고 우리에게 해답이 있을 것 같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떤 과거나 미래도 일직선 위에 있지 않으니 앞뒤에 선 사람처럼 서로가 서로의 해답일 리 없다. 그러니 청년이라면 누구라도 구시대가 쌓은 다층적인 억압들 속에 스스로를 가두거나 갇히지 마시길. 자유로운 그 열망이 여전히 당신 한 사람, 청년의 것이길. 퀴어든, 퀴어가 아니든.
소설가.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