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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의 첫날이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귀성 전쟁이 한창이었을 텐데 오미크론 감염의 대폭발을 앞두고 있어서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방역 수칙 안에서 차례도 지내고 부모님께 세배도 드릴 예정이지만 형제들이나 친척들은 만난 지 오래다. 연휴가 길다고 해도 가족들 만나 회포를 풀거나 고향 친구라도 만나면 시간이 모자라기 십상이다. 하지만 총리와 장관이 곳곳에 등장해 만남을 줄이라고 호소하니, 긴 휴일은 무엇으로 채우나.
고민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과 서울관의 관람 예약을 했다. 들어가 보니, 오호라, 두 곳이 연휴 중에 번갈아가며 무료다. 삼성 재벌이 기증한 미술품 관람은 일찌감치 마감이라 어렵지만 새로 문을 연 서울공예박물관을 들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자칫 소파에 몸을 붙이고 영상에만 매달려 있을지도 모를 위험을 피할 조처를 한 셈이다. 무엇을 할지 정해놓으니, 기다려진다.
오래된 도시의 오래된 건물들 사이를 누비는 산책이 도시의 첫인상을 결정하지만 내가 가장 기다리는 도심 산책의 백미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산책이다.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 그 도시가 소유한 문화적 자산을 경험하고서야 그 도시의 마음을 훔쳐볼 자격이 생긴다고나 할까. 런던에서 자연사박물관을 지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찻집 원탁에서 수다를 이어가면, 그 공간을 지나간 두꺼운 시간의 겹이 느껴진다. 그리고 비로소 그 도시가 가깝게 여겨진다. 뉴욕 공립도서관의 오래된 책 냄새를 맡고 나와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한국관까지 꼼꼼히 보고 나오면, 그때야 복잡한 이민의 역사를 안고 있는 그 도시의 면모를 슬쩍 본 느낌이다.
파리에 가면 루브르박물관에 가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느긋한 산책이 어렵다. 들어가기 어려울 때는 바깥을 빙빙 돌다가 돌아간 적도 있다. 이 박물관의 특별한 점은 역사가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건축물 가운데에 현대적인 피라미드 구조물을 박아 놓은 것인데, 그 상상력과 과감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가 이집트의 문화적 상징을 경복궁 마당에 영구적으로 설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것만으로도 파리를 조금 더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루브르를 떠나려면 거기 사는 고양이도 부럽다.
<루브르의 고양이>는 루브르에서 일하는 해설사, 청소부, 그리고 고양이들의 이야기다. 아무도 없을 때, 루브르를 누빌 수 있는 그들은 얼마나 좋을까? 루브르가 일터일 뿐인 패트릭에겐 예술이니 해도, 천에 물감을 바른 것뿐인 그림들. 하지만 평생을 그곳에서 일한 고참 마르셀은 어릴 적 헤어진 누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갔다고 믿는다. 그림 앞에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 같은 상상. 이번 연휴에 방문한 미술관에서도 그림 안으로,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기를.
누이가 들어간 그림은 큐피드의 죽음을 그린 <사랑의 신의 죽음>. “꽃은 항상 피어 있고, 바람은 언제나 살랑살랑 부는 곳.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근사한 꿈속이다.” 마르셀의 누이는 거기서 나올 생각이 없지만 그림 속으로 들어간 고양이 눈송이는 생각이 다르다. “춥고 냄새나고 시끄럽고 친구들은 죽어버렸지만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림 안의 세상에는 코로나19도 없고 자유로울 테지만 잔뜩 위로나 받고 돌아올 수밖에.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