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8일 경기도 의정부실내빙상장에서 열린 제 76회 전국 남녀 피겨스케이팅 종합선수권대회 겸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국가대표 2차 선발전 남자 쇼트프로그램에 출전한 이시형 선수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이시형 선수 제공
“피겨스케이팅만 할 수 있으면 모든 걸 견뎌낼 수 있어요. 2022년 베이징겨울올림픽 출전이 제일 큰 목표예요.”(이시형 선수,
2017년 12월27일 <한겨레 21> 보도)
2010 밴쿠버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김연아 선수를 보고 피겨스케이팅 선수를 꿈꾸게 된 소년은 미끌미끌한 초등학교 복도를 돌고 또 돌았다. 그리고 결국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돼 가장 큰 목표로 꼽았던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한다. 이시형(22·고려대) 선수의 이야기다.
이시형 선수는 지난 26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베이징겨울올림픽 출전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가장 큰 목표라고 했는데, 꼭 이루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큰 목표였을 뿐이기도 했거든요. 실제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좋은 기회로 출전할 수 있게 돼서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 선수의 올림픽 출전은 극적으로 이뤄졌다. 지난해 3월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차준환(21·고려대) 선수가 남자 싱글 10위에 올라 베이징겨울올림픽 출전권 ‘1+1장'을 획득했다. 올림픽 티켓 1장을 확보한 상황에서 나머지 1장은 차준환 외의 다른 선수가 네벨혼 트로피 대회에 나가 7위 이상의 성적을 올려야 딸 수 있었다. 이시형 선수가 개인 최고점을 경신하며 5위에 올라 총 2장의 출전권을 확보했다. 한국이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에 선수 2명을 내보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우상이었던 김연아 선수도 출전권 획득을 축하해줬다. “네벨혼 트로피 이후 복귀해 첫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김연아 선배님이 오셔서 김예림 선수와 제게 ‘네벨혼 트로피 잘 봤다, 올림픽 티켓 축하한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정말 감사하고 힘이 됐죠.”
그는 2009년 처음 김연아 선수를 보고 피겨스케이팅에 관심을 갖게 됐고, 2010년 밴쿠버겨울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시상대에 오르는 장면을 보고 ‘나도 꼭 저걸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피겨를 하고 싶다’고 어머니를 조르고, 학교 복도를 아이스링크장 삼아 돌고 또 돌았다. “학교 복도에서 계속 돌고 피겨스케이팅 동작을 연습하니까 담임선생님이 걱정돼서 어머니를 불렀을 정도예요.”
그렇게 피겨를 시작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이 걸림돌이었다. 피겨스케이팅을 하려면 레슨비와 아이스링크 대관료, 의상, 부츠, 안무와 작품 제작 비용 등 큰돈이 든다. 아버지는 피겨스케이팅을 반대했고, 결국 이시형 선수와 어머니는 집을 나와 고시원을 전전했다. “오전 6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링크장을 대관해 연습했어요. 링크장에서 고시원이 멀어서, 새벽 2시에 연습을 마치면 그냥 탈의실에서 자기도 했죠.”
이혼 뒤 홀로 김밥을 말면서 이 선수의 꿈을 지지해주던 어머니는 2013년 어깨 인대가 파열돼 일할 수 없게 됐다. 어머니는 갑상샘암 등으로 수술도 받았다.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수급비를 받고 각종 단체 등의 지원을 받았지만, 쌍둥이 여동생까지 네 식구가 생활하고 이 선수가 훈련하기엔 빠듯했다. 대회 출전권을 땄지만 자비 출전이라 포기하기도 하고, 부츠를 바꿀 돈이 없어 무너진 부츠를 그냥 신다가 발목을 다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2016년에는 부상 탓에 1점 차로 국가대표가 되지 못하면서 훈련 수당과 대관 지원 등을 받지 못해 훈련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다행히 힘든 순간마다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2016년에는 이 선수를 응원하는 개인들의 후원 등으로 다시 훈련할 수 있게 됐다. 2017년부터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으로부터 훈련비와 대회참가비, 레슨비 등을 지원받았다. “2016년 국가대표가 되지 못하면서 한 달 정도는 훈련을 하지 못했고, 피겨스케이팅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팬분들이 크라우드펀딩을 알아봐 주시고, 그 이후로도 많은 감사한 분들 덕분에 계속 링크장에 설 수 있었어요.”
이 선수는 이런 지원 덕분에 ‘슬럼프’도 겪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저는 아직 특별히 슬럼프를 겪어본 적이 없어요. 피겨스케이팅을 정말 사랑해서 시작했고, 많은 분이 도와주셔서 슬럼프가 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대회에서의 아쉬움이나 피겨스케이팅 선수로서는 불리한 186㎝의 큰 키도 그저 ‘묵묵히 열심히 하는 것’으로 극복한다고 말했다. “매번 대회마다 잘할 수는 없는 거니까, 아쉬울 때는 받아들이고 그다음을 더 잘 대비하려고 노력해요. 또 키가 큰 게 유리한 스포츠가 아니다 보니 힘들 때도 있지만, 바꿀 수 없는 부분이니 그냥 열심히 하는 것으로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 선수는 베이징겨울올림픽에서 “정말 열심히 훈련해서 올림픽 무대에 섰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겠다”며 “실수 없이 4회전 점프를 성공하고, 깔끔하게 연기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또 “장기적인 목표는 피겨스케이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선수는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은 열린다”며 자신처럼 형편이 어렵지만 스포츠에 애정을 가지고 국가대표를 꿈꾸는 이들을 격려했다. “자신이 하는 종목을 정말 사랑하고, 열심히 하다 보면 오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시면 좋겠습니다.”
김윤주 기자
k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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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에서 ‘스핀’하며 김연아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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