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기완 선생은 백발을 휘날리며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고 투쟁현장을 누볐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매일 아침 신문을 보시는데 그중 한 사진을 보고는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셔서 “야, 원희야 여기 와 봐라. 이 사진 봐라. 이거 불쌍해서 어디 보겠냐. 기가 막히잖아, 이놈의 세상. 이 어린 애가 물에 빠져 못 돌아오다니, 이게 말이나 되냐”라고 말씀하셨죠.”(채원희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사무처장)
고 백기완 선생이 생전 소장을 맡아 일했던 서울 종로구 혜화동 통일문제연구소 집무실 문에는 2014년 5월14일치 <한겨레> 1면 신문에 실린 ‘세월호 추모 촛불시위’ 사진이 붙어 있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 약자의 편에 서왔던 백기완 선생은 사진 한장에도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이었다.
백기완 선생 집무실 문에 붙어있는 2014년 5월 14일 <한겨레신문> 1면.
백기완 선생은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살자'라는 ‘노나메기 벗나래(세상)’를 꿈꾸며 불의한 세상에 맞섰다. 2005년 기륭전자, 2008년 밀양 송전탑, 2009년 쌍용차, 용산 참사, 2014년 세월호 등 거리의 투쟁 현장에서는 늘 맨 앞자리를 지켰다. 2020년 말 투병 중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한진중공업 복직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선생이 꿈꿨던 세상은 아직 요원하다. 일하다 죽는 노동자는 줄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내는 비정규직 등 사회 약자에게 법은 가혹하기만 하다. 불법파견 사용자 처벌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던 기아차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김수억씨를 포함한 노동자들이 9일 열린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형 및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시인이자 수필가이기도 했던 백 선생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의 글을 남겼다. 집무실 책상에 원고지와 펜, 안경, 세월호 리본이 놓여있다. 박종식 기자
백기완 선생은 “통일 열차가 만들어지면 하얀 손수건을 쥐고 고향인 황해도로 가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손수건이 전달됐다. 박종식 기자
백기완 선생이 체력단련을 위해 사용하던 악력기. 박종식 기자
선생의 뜻을 되새기고 이어가기 위해 어깨 겯고 함께했던 이들이 지난 8일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을 창립했다. 함께한 참가자들은 투쟁 현장에서 만난 백기완 선생을 회상했다. “선생은 노동교실이었다”(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힘든 몸을 이끌고 용균이 빈소 앞에서 큰절을 올리셨다”(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노동자 농민과 함께하셨던 분.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문정현 신부).
노나메기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은 신학철 화백은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의 한 걸음으로 백기완 정신을 계승하여 실천하기 위해 모두가 버선발로 나선다면 노나메기 벗나래는 곧 현실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김수억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구명을 촉구하는 특별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했다.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이 백기완 선생에게 보낸 손편지. 박종식 기자
신학철 화백이 그린 백기완 선생 그림이 서울 혜화동 집무실에 걸려있다. 박종식 기자
백기완 선생이 영면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글귀. ’노동 해방’. 박종식 기자
노나메기재단은 14일 오후 백기완 선생이 생전 소장을 맡았던 통일문제연구소 앞에서 개막 행사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1주기 추모 주간을 갖는다. 1주기인 15일에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추도식을 하고, 16일부터는 백기완기념관으로 재단장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민중미술작가 18명이 참여한 추모 전시회가 한 달 동안 열린다.
‘노나메기’ 세상을 꿈꿨던 선생의 빈자리가 새삼 커 보이는 2022년 새해의 첫머리, 백기완 선생의 1주기를 앞두고 선생의 뜻을 품은 유품을 톺아본다.
2022년 2월 11일자<한겨레> 사진기획 ‘이 순간’ 지면.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사진·글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