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회원들이 지난달 12일 오후 보신각 앞에서 ‘차별과 혐오, 증오선동의 정치를 부수자’를 주제로 열린 집회에서 대선 후보에게 바라는 점을 적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직장인 박호연(29)씨는 제20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9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박씨는 여성과 소수자 정책을 내놓은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를 뽑을 생각이었다.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밀려온 속상함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윤 후보 발언을 보는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여성의날(3월8일)에도 여성가족부 폐지를 에스엔에스(SNS)에 올렸잖아요. 2030여성은 ‘되는 표’가 아니라고 보는 거죠. 고민 끝에 이재명 후보로 마음을 바꿨어요.” 그는 “투표소에 가서도 마음이 계속 흔들렸다. 1번을 찍으면서 우습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고 말했다.
24만7077표. 역대 최소 표차로 당선자가 나온 20대 대선 결과에 대해 박씨 같은 20대 여성의 막판 결집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 정치권 안팎에서 나온다. <한겨레>가 9~10일 만난 20대 여성들 가운데는 ‘역대급 여성 배제 선거판’을 만든 윤 당선자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투표소에 갔다는 이들이 많았다.
지상파 3사의 공동 대선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20대 이하 여성 투표자 가운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한 비율은 58%, 윤석열 당선자를 찍은 비율은 33.8%였다. 20대 이하 남성에선 그 반대로 윤 후보 58.7%, 이 후보 36.3%였다. 선거일 직전 이뤄진 여러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에 대한 20대 여성 지지율은 30%를 밑돌았는데, 실제 투표에서는 그 2배에 이르는 표를 몰아준 것이다.
고심 끝에 이 후보를 선택한 20대 여성들은 ‘젠더 갈라치기’ 전략을 고수한 윤 당선자와 이준석 대표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대학생 한현지(21)씨는 “대학 총여학생회 폐지를 근거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외치는 이준석 대표를 보며 걱정이 됐다. 성평등 인식이 없는 것은 물론 여성혐오로 점철돼 보였다”고 말했다. 김유선(20)씨는 “이 대표의 젠더 갈라치기 전략은 오판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 행보를 보며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백인 남성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내놓은 각종 포퓰리즘 공약과 발언이 떠올랐다”고 했다.
‘엔(N)번방 추적단 불꽃’ 활동가였던 박지현씨가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에 들어간 것이 후보 선택에 영향을 줬다는 이들도 있다. 이은결(23)씨는 “박지현씨와 민주당 권인숙 의원이 이재명 후보를 ‘벼락페미’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 후보가 조금씩 여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열을 막기 위해 이 후보로 전략투표를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 후보와 민주당이 좋아서 찍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한현지씨는 “이 후보가 마음에 들어서, 잘해서 지지했다는 식의 해석이 나올까봐 걱정된다. 피눈물 흘리면서 지지 후보를 바꾼 걸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현정(21)씨는 “일부 남성들은 선거 결과를 보고 자신의 승리라고 말할 것 같다. 혐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호연씨는 “윤 당선자가 0.7%포인트라는 근소한 차이를 마음에 새기면서 여성을 배제하지 않는 정치를 했으면 한다”고 했다. 강아무개(30)씨는 “서로의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불을 지펴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은 이제 정치권에서 사라져야 할 때”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차선으로 이재명 후보를 선택했던 여성들의 ‘진심’은 정의당 심상정 후보에게 보낸 응원과 후원금으로 확인됐다. 출구조사가 발표된 9일 저녁 7시30분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심 후보에게 입금된 후원금은 12억원에 달한다.
제로섬·마이너스 정치로 판명 난 ‘이준석표 이대남 정치’를 두고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전략 수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일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10일 당선 인사 뒤 “저는 젠더·성별로 갈라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 것 없으니까 오해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10일 새벽 3시13분께 김유선(20)씨가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에게 보낸 후원금. 김씨 제공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 고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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