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 다릿돌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팀장이 19일 아침 대구 동구 안심역에서 내려 엘레베이터로 향하고 있다. 넓은 벽 한 가운데 손바닥 만한 엘리베이터 알림표가 보인다. 대구/백소아 기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비판하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엘리베이터는 94% 가까이 설치가 됐고, 도대체 뭘 위한 투쟁이냐”고 했다. 숫자는 때론 현실을 은폐한다. 여전히 장애인들은 지하철 환승에 진땀을 빼고, 수시로 고장 나는 엘리베이터(승강기) 앞에서 좌절한다. 지난 19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인수위)는 콜택시·저상버스 확대 등의 정책을 발표했지만 현재 장애인 콜택시는 운전 인력 부족으로 제때 배차가 안 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저상버스 100% 도입 약속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숫자 뒤에 가린 장애인들의 이동 현실을 짚어본다.
①승강기: 보급률 94%? 장애인에겐 여전히 ‘지옥철’
지난달 기준 지하철 출구에서 승강장까지 연결된 통로를 뜻하는 ‘1역사 1동선’(서울 지하철 1~8호선) 엘리베이터 설치율은 93.6%에 이른다. 그러나 장애인들에게 지하철은 여전히 ‘공포’다. 수시로 고장 나는 승강기와 리프트를 마주하고, 환승할 때마다 멀리 떨어진 승강기를 찾기 위해 역 안팎을 헤매야 하기 때문이다.
휠체어를 탄 지 20년이 된, 경기도 의정부에 사는 안일환(30)씨에겐 ‘절대 피하고 싶은 지하철역’이 있다. 지하철 1·4호선이 지나는 창동역과 1·6호선이 지나는 석계역이다. 4호선 혜화역 인근 직장에 다니려면 창동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해야 하지만 안씨는 일부러 동대문역까지 가서 4호선으로 환승한다고 한다. 악몽 같은 경험 때문이다. “몇년 전 1호선 창동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하려고 리프트를 탔었는데 갑자기 멈춘 거예요. 그날 우연히 아침 뉴스에서 지하철 리프트를 타다가 한 장애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온 길이라 더 무서웠죠. 막막해서 역무원을 호출했는데, 역무원도 당황해 나보고 ‘잠깐 일어서달라’고 말하는데…둘 다 방법이 없어 쩔쩔맸어요. 당시 숨도 못 쉴 정도로 더운 여름이었는데 멈춰 선 리프트 위에서 계속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는 한달에 여덟번 넘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다른 역으로 나가 이동했던 경험도 털어놨다.
안씨는 동대문역에 설치된 장애인 전용 ‘수직형 리프트’도 피하고 싶다. 수동으로 문을 열어야 하는 탓에 매번 리프트를 탈 때마다 역무원을 호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씨는 “기다리는 시간은 매번 다르지만 역무원이 자리에 없으면 10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환승 구간을 연결하는 승강기가 없어 지하철역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4·7호선이 지나는 노원역이 대표적이다. 배재현(43)씨는 “노원역에서 환승할 때마다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야 하는데 지하철역 주변 도로 바닥이 깨져 있어서 휠체어 타기가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간격과 높이 차이인 ‘단차’는 장애인들이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다. 서울교통공사는 장애인들이 지하철 승하차 전에 역사에 전화해 이동식 안전발판 설치를 요청하면 지원하고 있지만,
발판을 설치해줄 역무원이 서비스를 요청한 장애인이 탄 열차 도착 시각을 제때 맞추지 못해 장애인이 발판 사용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역마다 승강장 번호가 다른 경우도 있어 엉뚱한 승강장에 이동식 발판을 놓고 역무원이 가버리는 일도 자주 생긴다고 한다.
휠체어 1대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고령자, 유아차 이용자 등과 같이 타다 보니 난감한 일도 생긴다. 안씨는 “승강기 내부 공간이 좁아 안에서 한바퀴 돌 수가 없다. 한번 들어가면 뒤로 그대로 나와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종 뒤를 제대로 보지 못해 휠체어와 노인, 임산부들이 부딪히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지하철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이나 임산부, 유아차 이용자 등 모든 교통약자의 ‘이동의 질’을 개선한다는 관점에서 풀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장연 등 장애인단체는 ‘1역사 1동선 역’이더라도 늘어난 이동 수요와 고장 등을 고려해 2개의 승강기를 설치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지난 18일 찾은 서울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 있는 휠체어 사용자 전용 ‘수직형 리프트’ 모습. 박지영 기자
②장애인 콜택시: “보급만 하면 뭐 하나, 출퇴근 시간대 50분 기다리는데”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중증장애인 150명당 1대를 100명당 1대로 확대해 장애인 콜택시 대기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보급률만 끌어올릴 게 아니라 실제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교통약자 이동지원센터 내 운전 인력 충원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21일 <한겨레>가 확보한 ‘서울시 장애인콜택시 운행 사항(2021년 기준)’ 자료를 보면, 서울시설공단이 운영하는 이동지원센터 내 차량은 620대, 운전원은 721명이다. 시간대별 운행 현황을 들여다보면, 출근 시간대인 아침 8시∼오전 10시 사이에는 평균 267대가 운행하고, 대기 시간은 40∼48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집계됐다. 퇴근 시간대인 오후 5시∼저녁 7시도 운행 차량은 262대, 대기 시간은 37∼48분으로 집계됐다. 이동 수요가 제일 집중된 출퇴근 시간대 전체 차량 중 절반에 못 미치는 차량만이 운행한 셈이다.
이는 하루 9시간 근무하는 정규직 운전원 근무체계에서 현재 인력으로 주7일 24시간을 운영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매일 평균 약 30%의 운전원이 휴가·휴무나 교육 등으로 근무를 빠지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재민 전장연 정책국장은 “24시간 운영하는 이동지원센터가 보유한 차량들이 제대로 운행되기 위해서는 1대당 주간·저녁·야간 3명의 운전 인력이 필요하다. 현재 정부는 법정 대수 보급만 얘기하고 있지만 운전 인력이 확충돼야 이동지원센터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의 경우 최소 현재 인력의 두배 이상이 돼야 정상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장상록 서울시설공단 이동지원센터장은 “가장 수요가 많은 출퇴근 시간대 부분적으로 인력을 투입하는 방안을 서울시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수도권 밖 지역 이동지원센터 사정은 더욱 열악하다. 보급 대수 자체도 부족하고, 콜택시를 운전할 인력도 부족하다.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토교통부에서 제출받은 ‘2020년 특별교통수단 운영 현황’ 자료를 보면, 부산광역시의 경우 장애인콜택시 보급 대수는 181대인데 운전 인력이 부족해 한달 이상 연속으로 운행 실적이 없는 차량 대수는 34대다. 경기도 이천시와 화성시도 운전 인력 부족으로 각각 24대 중 3대, 58대 중 6대가 한달 이상 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임경미 충북 옥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지역의 경우 장애인 콜택시가 거의 유일한 이동 수단이다. 점심시간 약속이 있어 콜택시를 부르려고 하면 운전기사님들이 점심 드시러 가셔서 정작 점심 먹으러 나가려고 콜택시를 불렀던 장애인들이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교통약자 이동지원센터가 24시간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선 중앙정부가 나서서 예산을 지원하고 지속적인 운영 사항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장연은 “현재 각 지자체는 예산 한계 등의 이유로 인력 확충이나 운영 기준 등을 자체적으로 정해 놓고 있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인력 확충을 위한 예산을 투입하고 관리·감독하라”고 인수위에 요구하고 있다.
노들장애인야학의 학생이 2020년 2020년 5월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 유리빌딩 주차장에 임시로 마련된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마친 뒤 월계동 자택으로 귀가하기 위해 장애인콜택시에 오르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③저상버스: 도입 100% 약속했지만…이대로면 공염불
지난해 11월 국토교통부(국토부)는 ‘제4차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 계획’을 발표하면서 2026년까지 서울 시내버스를 모두 저상버스로 교체하겠다고 밝혔다. 2015년 서울시 또한 ‘장애인 이동권 증진을 위한 서울시 선언’(서울시 이동권 선언)에서 시내 저상버스를 2025년까지 100%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도로 폭이나 경사로 등 노선별 도로 사정에 따른 ‘도입 불가’ 노선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정부와 지자체의 약속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5월 발표된 ‘2020년 교통약자 이동 편의 실태조사 연구’를 보면, 서울 시내버스 운행 노선 수는 모두 356개로 이 중 저상버스가 도입된 노선은 286개다. 앞으로 70개 노선에 저상버스가 도입돼야 한다. 그러나 국토부가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서울시 저상버스 운행 불가 노선 현황’ 자료와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해 1월 기준 도로 여건 때문에 저상버스 ‘도입 불가’ 판정을 받은 노선은 62개 노선으로 파악된다.
일반 버스보다 차체가 낮고 가로 폭이 긴 저상버스는 도로에서 회전할 때 더 큰 도로 폭이 필요한데, 폭이 좁으면 저상버스가 아예 운행할 수 없다. 또한 과속 방지 턱 등 도로 표면에 요철이 많거나 경사가 심한 도로에서도 운행이 안 된다. ‘서울시 저상버스 운행 불가 노선 현황’ 자료에서 대부분 저상버스 도입 불가 사유는 ‘도로 폭이 협소’하거나 ‘급경사 회전 시 (저상버스) 차량 하부가 도로와 접촉하여 차량 파손 가능성이 큼’ 등이었다. 또 버스 차고지 진입로의 경사가 심해 저상버스가 들어올 수 없는 노선도 있다. 1131번 등 5개 노선 차고지인 서울 노원구의 중계본동 차고지와 104번 등 3개 노선 차고지인 강북구 우이동 차고지다. 지역이나 농어촌의 경우 도로 사정이 더 열악하다 보니 저상버스 도입이 속도를 내지 못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지난해 12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교통약자법) 개정으로 저상버스 도입이 의무화되면서 이제서야 실태 조사에 나섰다. 도로 폭이 좁은 노선 같은 경우는 사실상 노선 변경 외에는 방법이 없는데 주민 반발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당장 도입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고민언 서울시 버스정책과 버스운영팀 주무관은 “교통약자법 개정으로 저상버스 도입이 의무화되면서 예전보다 강화된 기준으로 불가능 여부를 따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 명시적으로 도입 불가 노선을 판정하는 기준은 없고, 이에 대한 해결책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국토부는 지자체별로 시내 저상버스 도입 불가능 노선에 대한 실태 조사를 거친 뒤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입장이다. 박동국 국토부 생활교통복지과 주무관은 “현재 지자체별로 도입 불가 구간 확인을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기사에서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간격인 단차’라는 표현을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간격과 높이 차이인 단차’로 4월29일 오전 11시에 수정합니다.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간격과 높이 차이 때문에 장애인들이 휠체어 사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표현을 수정했습니다.
박지영 기자
jy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