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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아이’와 ‘부모’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린 시절 경험한 부모의 생각, 감정, 행동, 태도를 닮은 ‘내면 부모’와, 그 부모의 양육 방식에 반응하여 형성된 내적 자아인 ‘내면 아이’ 말이다. 그러나 성소수자인 나는 인격의 형성과 어린 시절의 상처, 혹은 그 치유를 말하기 위해 마련된 위의 개념 앞에, 이따금 혼란스럽다. ‘미성숙’ ‘부적응’ ‘퇴행’ 등을 말할 때, 그 기준은 어떻게 세워진 걸까? 그러니까, ‘성숙’ ‘적응’ ‘순행’의 개념은 온전히 불변이며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일까?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성소수자로 살아오면서 개인적으로 제일 불편한 상황 중 하나는, 누군가 나의 성소수자 정체성을 과거의 ‘트라우마’나 ‘상처’에서 찾으려 할 때다. 해체된 가정이었기에, 제대로 된 육아를 받을 수 없었기에 내가 성소수자가 되었다는 ‘분석’ 말이다. 분석이란 말조차 부당하다고 나는 믿는데, 그들이 내민 기준은 내 삶의 어떤 요소도 제대로 나누거나 쪼개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상’이라는 사회적 기준에 욱여넣으려는 시도뿐이다. ‘이해’나 ‘공감’마저, ‘정상 가족’ ‘정상 성별’에 근거한다. 불안의 원인은 오롯이 ‘결핍’이고, 역할의 불능에 대한 규정은 (정신적인 구체具體를 포함한) ‘몸’의 운동성만을 지적한다. 과잉된 풍요로움이 오히려 결핍의 원인이 되거나, 다른 움직임을 지닌 몸들의 훌륭한 역할을 배제하고 평가하려 한다. 그러니 치유는 간단하다. 낡은 기준에 근거한 부재나 결핍을 채워넣는 것이고, 몸을 ‘정상 기준’에 맞추는 것. 그러지 못한다면, 평생이 망가지고 큰일 나는 것. 몇개의 목록만으로 분석은 가능하고, 해답은 유사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어떤 수고가 필요할까? ‘트랜스젠더’라고 불리는 한 사람으로 살지만, 오십 중반으로 다가가는 지금도 나는 이따금 혼란스럽고, 여전히 혼란스럽다. ‘산다는 게 뭐지?’ ‘내 삶의 의미는 뭐였지?’라는 비성소수자 중년의 고민과 아주 유사하다고 나는 믿지만, 같을 수는 없다.
김비 작가가 친구 부부 아이 하진이와 어울려 노는 모습. 김비 제공
타고났다고 믿는 일부와 길러졌다고 믿는 또 다른 일부가, 어떤 양육자를 어떤 환경 속에 만나 내 존재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는지 당사자인 나는 당연히 알 수 없다. 나는 그 일부만이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생존은 더 이상 개인의 의미일 수 없으니, 개인의 몫과 사회의 몫은 긴밀하게 연결되었을 것이다. 주어졌거나 길러졌거나 각자가 품은 것들을 나눌 때, 최소한의 기본 가치가 지켜져 서로 나눌 수 있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 제 우물 앞에 선 누군가는 팔을 뻗어 그 물을 한 모금 머금을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같을 수 없는 ‘내 몫’으로 인해 허약하고 두려웠을 어린 시절의 나는 불안했겠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좀 더 강한 내가 되어 ‘같을 수 없음’을 직면한다. 성소수자인 나는, 또한 성소수자일 나만의 ‘퀴어 내면 아이’를 마주한다. 그 아이를 끌어안고, 그 아이와 같이 가자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회가 보여준 포용력이 나를 그럴 수 있게 만들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치유라면 치유일까? 지금은 특정 세력에 의해 공격받고 부정당하는 우리 사회의 포용력을, 나는 아직도 굳게 신뢰한다.
모 육아 상담 프로그램에서 ‘치마 입는 남자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다고 들었다. 아동 상담 전문가 선생께서 아버지의 역할 부재와 관련해 이야기를 풀었던 모양인데, 방송을 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한 해결책이리라 생각한다. 다만 2022년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어른으로서 첨언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을 수 있고, 그럼에도 자신의 지정 성별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더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아쉬움 말이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뭐가 떨어진다’는 류의 낡고 낡은 믿음은, 도대체 언제까지 그 겉모습만을 바꾸며 이 사회에서 반복되어야 하는 걸까?
2018년 프랑스 갔을 때 찍은 거리 풍경. 김비 제공
생각해보면 결국 ‘첫 단추’의 문제다. 기능적 의미의 몸이나 육체적 성별에 온 생애를 가두지 않고, 더 많은 가능성을 꿈꾸는 존재로 한 인간의 삶을 열어두면 어떨까? ‘정상’의 테두리를 불변으로 남겨 놓고서 자신과 닮지 않은 누군가를 간단히 목록화하는 습성에서 벗어나, 타자와 나를, 인간 사회와 자연이라는 세계를 겸허히 관찰하고 성실하게 배워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 말이다. 이 세계에 사는 모든 생명의 가치를 다시 처음부터 되새길 수 있는, 새로운 ‘첫 단추’ 말이다.
그래서 ‘치마 입는 남자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 거냐 구체적인 해답을 내놓으라고 요청한다면, 비전문가인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첫번째 해결책은 ‘기다림’일 수밖에 없다. 양육이란 곧 교육일 텐데, 나는 교육으로 한 사람의 성별이나 성적 지향을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믿는 태도가 오히려 아이를 망칠 가능성이 더 크다. 폭력적으로 억압하거나 불안을 야기하는 양육자의 태도는, 분명히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사랑을 구별해서 쓴다는 건
그럼에도 ‘기다림’을 제일 먼저 언급한 이유는, 오히려 양육자를 위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다 보면, 우리는 조급해진다. 사랑하는 존재를 대할 때, 특히 그 대상이 내 책임인 것 같을 때, 조급해지고 만다. 나는 양육을 잘 모르는 한 사람이지만, 양육이 어려운 건 사랑을 구별해 써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어떤 때는 한없이 너그럽고, 또 어떤 때는 단호해야 하기 때문에.
단호해야 할 때는, 사랑을 줄 때, 믿을 때, 공존의 책임을 가르칠 때, 존중받는 존재임을 각인할 때다. 아이를 틀 안에 가두거나, 아이의 성별을 지정할 때가 단호해야 할 때일 리는 없다. 태어난 생명은 모두 제 존재를 찾아가는 길 위에 있으니, 혼자가 되지 않도록 곁에 있어주는 일만이 양육자의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섣부르게 단정 짓거나 규정하지 않은 채로. 서로 다른 가능성 속에 생의 행복을 불어넣어 주면서. 우리들의 ‘내면 아이’는 언제쯤 제대로 된 ‘내면 부모’를 만날까? 퇴행적이고 불안정한 자아와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 속의 ‘아이’와 직면해야 한다.
김비 | 소설가.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