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28일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헌법재판소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헌재 결정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상에 있는 지옥불 가운데 대법정처럼 지독한 곳은 어디에도 없어. 그런 곳은 개정 기간 중 가장 바쁜 날에 땅속에다 지뢰를 파묻어, 위쪽과 아래쪽, 높은 놈과 낮은 놈은 물론 거기에 관여하는 놈 모두랑 기록과 법률과 선례까지 모조리 모아놓고 화약 천 톤을 터트려서 깡그리 날려버려야 해, 조금이라도 개혁하려면!”(<황폐한 집>, 찰스 디킨스 지음, 김옥수 옮김, 비꽃 펴냄)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찰스 디킨스가 1853년에 쓴 <황폐한 집>에서 영국의 최고재판소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표현한 대목이다. 디킨스는 이 책에서 영국의 사법제도가 민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했다. 디킨스가 살던 시대는 지금의 3심제도와 크게 달랐다. 영국은 15세기부터 성문법인 보통법(Common Law)과 판례에 근거한 형평법(Equity)으로 이원화된 사법제도를 갖고 있었는데, 유산과 신탁 등 개인 간 재산 다툼을 심리하는 재판은 판례인 형평법에 따라 왕이 임명한 대법관들이 재판했다. 문제는 분쟁이 발생한 재산이 대법원에 묶이고, 대법관과 변호사 등 재판에 관여하는 모든 인력과 종이 등 소모품의 비용을 소송에 묶인 재산에서 충당했다는 사실이다. 대법관과 변호사들은 소송을 최대한 오래 끌어야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반면 소송 당사자들은 소송의 장기화로 엄청난 경제적 고통을 겪어야 했고, 이로 인해 가족과 지역공동체 해체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고 한다.
19세기에 있었던 영국 최고재판소의 횡포가 21세기 미국에서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세계 최고재판소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꼽혔던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금 미국 사회를 분열시키는 주범으로 비난받고 있다. 지난 6월24일(현지시각) 미 연방대법원은 50년 동안 헌법적 권리로 인정받던 여성의 임신중지(낙태)에 관한 권리를 하루아침에 뒤집는 판결을 내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대법원이 미국을 150년 전으로 돌려놓았다”(조 바이든 미 대통령)라는 조롱이 나올 정도로 시대에 역행하는 판결이다.
미 연방대법원의 퇴행은 낙태 판결에 그치지 않는다. 6명의 보수 대법관들은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총기 규제를 무효로 만드는가 하면, 연방대법원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정교분리 원칙을 허무는 판결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미국은 물론 전세계의 미래 세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후위기 관련 대책을 무력화시키는 판결을 내려 파장을 일으켰다.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30일 미 환경보호청(EPA)이 석탁 화력발전소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위헌으로 판결했다. 웨스트버지니아 등 공화당 주지사가 있는 18개 주정부가 환경보호청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6명의 보수 대법관들이 공화당 주지사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판결로 바이든 행정부가 2035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에너지 체계를 전환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다.
미 연방대법원의 횡포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연방대법원을 6(보수)-3(진보) 구도로 만든 뒤 극심해졌다. 1970년대 이후 연방대법원은 중도 성향의 ‘스윙보터’ 대법관 1명을 배치한 5-4 구도를 유지해왔다. 연방대법원 판결이 진영논리에 휩쓸리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황금률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공석이 된 3명의 대법관 자리를 모두 보수 성향 법관들로 채웠다. 그 결과 미국 사회는 지금 전례 없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연방대법원 판결에 쫓겨 미국은 완전히 분리된 나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미 합중국이 아닌) 미 분열국(the Disunited States)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지적했다. 사법부의 대국민 신뢰도는 역대 최저 수준이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최근 미 연방대법원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25%(연방대법원을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에 불과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금 보수 대법관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미국의 사법적 전통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개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미 연방대법원의 퇴행을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는 이유는 윤석열 정권 임기 중 최고위 법관들이 역대 최대 규모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헌법재판소 소장을 포함한 헌법재판관 9명 전원과, 대법관 14명 중 대법원장을 포함해 12명이 교체된다(종신제인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대법관·헌법재판관 임기는 6년이다). 문제는 윤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상 상당수가 보수 성향 법조인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대법원과 헌재는 과거 ‘서오남’(서울대 법대-50대-남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수 성향의 남성 법조인들이 오랜 기간 장악했다. 당시 이들이 내린 판결은 마치 찍어낸 듯 일방적으로 보수 쪽으로 치우쳐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대법관·헌법재판관 교체 시기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 때 5명의 진보 성향 법조인들이 대법관에 임명되면서 비로소 다양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보수 우위의 구도는 그대로 유지됐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들어 다시 보수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헌정사상 초유의 정당해산 결정과 ‘사법농단’과 같은 퇴행적 사건들이 발생했다. 문재인 정권에서는 강력한 사법개혁 분위기 속에서 대법원과 헌재에 진보 우위의 구도가 만들어졌고,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위헌 결정 등 진보적인 판결이 나왔다.
최고재판소의 균형과 다양성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서 국가, 시장의 기능과 개인의 권리가 충돌하는 현상은 잦아지고 개인의 권리구제 의식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결국 최고재판소의 판단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대법원이 지난 5월26일 선고한 임금피크제 판결이 이를 잘 보여준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만을 이유로 한 임금피크제는 현행 고령자고용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임금이 삭감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정년 연장 같은 보상 조처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는 취지다. 이 판결은 그동안 임금피크제를 둘러싸고 엇갈렸던 하급심 판결에 처음으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 대법 판결이다. 그동안 대법원이 노동 이슈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해왔던 것을 고려하면 노동계가 “당연한 판결”이라며 환영 의사를 밝힌 것처럼 매우 전향적인 판결이다.
헌재 구성의 다양성은 대법원보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헌재가 헌법적 기본권이 쟁점인 사건을 다루는 재판소이기 때문이다. 2018년 6월28일 선고된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 위헌 결정이 대표적이다. 이 결정이 있기 전까지 매년 600여명에 이르는 젊은 남성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병역기피자라는 비난과 함께 사회적 냉대와 집단적 따돌림까지 당해야 했다.
앞서 헌재는 2011년 7-2 의견으로 양심적 병역거부 처벌을 합헌이라고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합헌(다수의견)에 가담했던 보수 성향 재판관 2명이 퇴임하고 후임에 진보와 중도 성향의 재판관들이 들어오면서 2018년에는 헌재 구성이 보수 일변도에서 탈피했다. 여기에 기존의 중도 성향 재판관들이 위헌 결정에 참여하면서 진일보한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윤석열 정권의 사법권력 재편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는 9월4일 임기가 끝나는 김재형 대법관의 후임 인사다. 학계와 정통 법관, 법조인 가운데 어느 출신이 임명되느냐에 따라 윤 대통령의 사법권력 재편 방향을 엿볼 수 있다. 문재인 정권 때부터 없어진 검찰 출신 대법관을 다시 임명할지도 관심거리다. 헌재는 대통령과 대법원장, 국회(여야 각 1명, 합의로 1명 지명)가 각각 3명씩 재판관을 지명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겉으로는 대통령 마음대로 구성할 수 없게 돼 있지만, 실상은 대법원장과 국회 여당 몫을 통해 최대 7명까지 대통령 마음에 드는 재판관으로 임명할 수 있다. 보수 일색의 헌재에서 정당해산이라는 퇴행적 결정이 내려진 게 불과 8년 전이다. 윤석열 정권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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