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한겨레>가 찾아간 건물의 뒷모습. 외벽을 장식한 수많은 실외기 중 돌아가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고병찬 기자
“이 사진 알죠. 뉴스에 자주 나오잖아요. 그런데 화재 위험은커녕 지금은 실외기가 돌아가지도 않을 텐데…”
실외기 가득한 한 건물 외벽 사진을 본 황보상호(60)씨는 단박에 알아봤다. 이곳은 황보씨가 일하는 안경원이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 시장의 10층 건물이다. 건물 뒤편 달린 수많은 실외기 때문에 언론에 자주 노출된다. 폭염과 전력난이 이슈로 떠오르는 여름만 되면 단골로 등장하는 ‘포토스폿’인 셈이다.
서울 시내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인 탓에 <한겨레>를 포함한 수많은 언론에선 여름철 폭염·전력난 소식을 전할 때 수시로 이곳을 찾아 ‘전력 공급예비율 연중 최저’, ‘에어컨 풀 가동’ 등과 같은 제목을 달아왔다.
올여름에도 여러 매체가 이곳의 사진을 보도하며 비슷한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황보씨의 말처럼 14일 찾아간 건물 뒤편에선 실외기가 뿜어내는 열기와 팬이 돌아가는 소음을 느낄 수 없었다. 주로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중저가형 호텔인데 코로나19로 3년째 ‘개점휴업’ 중이기 때문이다. 객실이 비어 있으니 당연히 실외기가 돌아갈 일도 없다. 호텔은 가동도 안 하는 에어컨 때문에 ‘전력 낭비’라는 오명을 3년 동안 써왔던 것이다.
호텔 쪽 설명을 들어보면, 10층짜리 건물 3층부터 10층까지 호텔에서 사용한다. 1969년도에 준공돼 올해로 만 53년째 된 건물이라 신축 건물처럼 옥상에 실외기를 올릴 수 없어 각 방의 실외기를 외벽에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일본 등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이 고객인 남대문 시장 일대가 지난 2020년부터 코로나19로 발길이 뚝 끊기며 이곳 호텔도 사실상 휴업 상태다. 이 건물 1층에서 모자가게를 운영하는 50대 ㄱ씨는 “코로나 때문에 상인들 수입이 10분의 1로 줄었다. 호텔도 비슷하다”고 했다. 황보씨는 “지난해 4월엔 호텔에서 납부하는 건물 공동전기료가 미납돼 한전에서 엘리베이터 등에 들어가는 전기를 끊겠다고 해 1∼2층 상인들이 대신 분담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전기료도 제대로 못 내는 상황인데 전력을 낭비한다는 누명까지 썼으니 호텔 입장에선 억울할 만하다.
14일 <한겨레>가 찾아간 건물의 모습. 고병찬 기자
해당 호텔은 해마다 전력 낭비의 상징처럼 언론에서 다뤄지는 것이 불만이다. 호텔 관계자는 “영업도 안 하는데 동의 없이 (실외기) 사진만 나오고 있어 상업적으로 계속 사용한다면 법적 조처를 할 생각도 있다”며 “실외기 주변이 검게 그을린 부분도 몇년 전 옆 건물 화재 때문이다. 소방 안전 관리자를 두고 안전에 유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구청 건축관리팀 관계자는 “현재 해당 건물 실외기 때문에 들어온 민원은 없다”며 “실외기를 외벽에 설치하는 것에 대한 설치 권고사항은 있지만, 제재 규정은 없다”고 밝혔다.
고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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