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n)번방’ 사건이 2019년 공론화된 뒤 후속 대책으로 이른바 엔번방 방지법이 시행되는 등 제도적 보완책이 마련됐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래픽 고윤결 bori78@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성착취물 공유방에 접근하기까지 걸림돌은 없었다. 트위터 검색창을 연 순간부터 관련 키워드를 검색하고 링크를 통해 성착취물 공유방에 입장하기까지 단 7초면 충분했다. ‘엔(n)번방’ 사건이 2019년 공론화된 뒤 후속 대책으로 이른바 엔번방 방지법이 시행되는 등 제도적 보완책이 마련됐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최근 엔번방 사건과 유사한 성착취물 제작·유포 범죄가 다시 발생해 경찰이 수사에 나선 가운데, 지난 14일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서 발생한 스토킹 살인 사건에서도 범인 전주환(31)이 불법촬영물을 유포하겠다며 피해자를 협박하고 만남을 강요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불법촬영물 제작·유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보완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겨레>는 텔레그램 성착취물 공유방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공유방 가운데 최근 ‘1번방’에 입장했다. 19일 기준, 이 방의 구독자 수는 1253명으로 10일 전쯤에 견줘 400명 가까이 늘었다. 이 방에 드나드는 사람은 구독자 수보다 훨씬 많다. 텔레그램은 올라온 글을 몇명이 읽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방장이 올린 글은 최소 4300명이 읽은 것으로 표시됐다.
무료로 운영되는 1번방은 유료 성착취물 공유방인 ‘2번방’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되고 있었다. 저녁 6∼7시가 되면, “아직도 2번방에 입장 안 하신 사장님이 계신다? 말이 안 되지. 2번방 입장료 문상(문화상품권) 2만원”이란 글과 함께 무료 성착취물이 뿌려졌다. 이 방에서 참여자 사이에 대화는 할 수 없다. 오직 방장의 계정 정보만 공개되어 있다. 성착취물을 사려는 사람은 방장 개인 계정으로 문화상품권을 보내야 2번방에 입장할 수 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의 삶과 영혼을 산산조각 내는 성착취물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방장은 ‘몇번방까지 있는가’라는 물음에 “2번방부터 본게임이다. 업로드 콘텐츠 및 운영 방식은 (2번방에) 입장하면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경찰에 붙잡힐 수도 있지 않으냐’는 말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디지털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여러 조처가 나왔지만, 허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성착취물 생산자와 소비자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구조가 깨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시행된 ‘엔번방 방지법’(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인터넷 사업자의 성착취물 유통 방지 의무를 강화한 것이 핵심이다. 연 매출 10억원 이상 또는 하루 평균 방문자가 10만명 이상인 87개 인터넷 사업자는 불법촬영물 신고·삭제 요청을 받은 경우 지체 없이 해당 게시물을 삭제해야 하고 불법촬영물, 성착취물 등의 검색에 쓰이는 단어를 ‘금칙어’(금지어)로 지정해 검색에 제한을 둬야 한다. 하지만 이용자가 이런 검색어를 우회할 수 있고, 사업자가 금칙어를 지정하다 보니 누락된 단어가 많아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한겨레>가 트위터에서 찾은 성착취물 공유방 링크 게시글에는 성착취 피해자와 성착취 행위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를 비롯해 여성 성기를 일컫는 말까지 해시태그로 달아놨다. 누구나 이 단어를 검색하면 성착취물 공유방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엔번방 방지법 적용 대상인 일부 플랫폼에서도 불법촬영물을 뜻하는 대표적 단어인 ‘몰카’ 등으로 검색이 가능했다. 다른 사이트에서는 게시물 자체는 아니지만, 성착취물 공유방 등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링크가 게시물 댓글로 달려 있기도 했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직접적인 성착취물 게시가 아닌) 텔레그램 등으로 유인하는 게시물 등과 관련해선 다른 이용자의 신고 등을 통해 사업자가 자체적으로 글을 차단하거나, 수사기관이 나서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금칙어 지정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지적을 놓고서는 “표현의 자유 침해나 검열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어 어렵다”고 밝혔다.
무료로 운영되는 1번방은 유료 성착취물 공유방인 ‘2번방’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되고 있었다. 텔레그램 갈무리
전문가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조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비영리단체 리셋의 최서희(활동명) 대표는 “인터넷 사업자가 자신들의 플랫폼 안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인 행위에 적절한 대처를 못 하면서 디지털 성범죄는 플랫폼을 넘나들며 발생하고 있다. 국내 사업자들에게조차 그 영향력이 미미한 상황인데 텔레그램 등 국외 사업자가 반응하겠는가. 방통위나 수사기관 등이 보다 강경하게 대응하도록 엔번방 방지법의 허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했다.
광고성 게시물을 이용해 불법영상물 공유방으로 ‘유인’하는 행위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성착취물 공유방 등으로의 접근 통로를 차단하려면 불법촬영물 등을 판매·제공하거나 공공연하게 전시·상영하는 자만 처벌하는 게 아니라 광고·소개하는 행위까지 강력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현행 청소년성보호법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배포·제공을 목적으로 광고·소개한 사람을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돼 있다. 영리가 목적이라면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는다. 그러나 일반 불법촬영물의 광고·소개에 대한 처벌 조항은 없다. 앞서 2020년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불법촬영물 처벌 대상을 ‘광고·소개한 사람’까지 넓히는 등의 내용을 담은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이 법안은 2년째 상임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박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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