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19일 오전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스토킹 범죄 피해자 추모 공간을 찾은 한 시민.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여자화장실 앞에 방송사 카메라가 버티고 있다. 화장실에서 나오던 한 여성은 카메라 때문인지 나오다 말고 벽에 기대어 숨는다. 고개를 슬쩍 내밀고 동태를 살피지만 카메라가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돌리고 나온다. 지난 17일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화장실 앞에서 본 모습이다. 가득한 흰 국화꽃과 다닥다닥 벽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하는 시민과 꽃을 들고 줄을 서는 (대부분 여성) 시민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바로 이틀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화장실에는 계속 사람들이 드나든다. 기본적인 생리 현상을 해결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벽에 붙은 ‘여성이 행복한 서울 여행(女幸) 화장실’이라는 팻말이 마치 여성을 놀리는 듯하여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며칠 후에는 누군가가 그 위에 ‘거짓말’이라는 포스트잇을 붙였다.
성서학자 필리스 트리블의 <공포의 텍스트>는 성경에 나오는 네명의 여성 인물이 겪는 잔인한 폭력을 재해석하는 수사비평이다. “이용되고 학대받고 버려진 노예 하갈. 강간당하고 버림받은 공주 다말. 강간당하고 살해당하고 사지마저 토막 난 첩, 이름도 없는 여성. 죽임당하여 제물로 드려진 처녀, 입다의 딸” 이렇게 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트리블이 성경이라는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여성이 겪는 폭력을 선택한 계기는 “자신의 실존적 경험”이었다. 뉴욕 거리에서 ‘내 이름은 다말’이라 적힌 팻말을 들고 있던 학대당한 여성을 보며, 쓰레기통에서 몸의 일부가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읽으며, 이름도 없는 여성들의 추모 예배에 참석하며 트리블은 성경 속에서 학대당한 여성들의 현재성을 인식한다.
성서 텍스트를 다시 읽고 해석하는 작업은 트리블에게 가해자들만이 아니라 “개입하지 않는 부재의 신”과도 싸우는 일이었다. 그동안 “희생자들을 얼버무리고 넘어가게 만들어왔던” 텍스트 속에서 소품 취급받은 희생자들을 한명 한명 꺼내어 억울함을 달래주는 의식이라 볼 수 있다. 학대받는 여성들과 마음을 같이하며 추모하는 마음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이 책에 트리블은 한명 한명의 묘비까지 그려 넣었다. 트리블은 과거의 문화를 검토하는 비평으로서 페미니즘을 “예언자적 운동”이라 표현한다. 예언자적 운동이 될 정도로 여성 대상 폭력은 끈질기게 반복되어왔다. 우리는 과거 속에서 분명히 현재의 비극을 인지하고 미래에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퇴행을 자처한다.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역무원이 근무 중에 같은 회사 남성에게 살해되었다. 모르는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또다시 여성들이 모인다. 신당역 승강장에 유난히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많이 보이는 게 나의 착각은 아닌 듯하다. 여성 대상 폭력이 일상이듯이 일상적 공간이 추모 공간이 된다. 대학 캠퍼스 안에서 남학생이 여성 동기를 성폭행하고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한 지 꼭 두달 만이다. 함께 학교에 다니는 동료를, 함께 직장에 다니는 동료를, 이들은 불법촬영하거나 스토킹으로 수년을 괴롭히거나 성폭행했으며 끝내는 살해했다. 불법촬영에서 살해까지, 두 사건에는 여성 대상 폭력이 종합적으로 모여 있다. 폭력에 제동을 거는 어떤 제도도 없어 보인다.
지난 7월17일 인하대학교 내에 마련된 성폭력 피해자 추모 공간에 학생들이 헌화를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대상 폭력은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스펙터클이다. 인하대 사건에서 여성 피해자가 발견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자극적으로 보도했듯이 여성의 죽음은 선정적인 소재다. 여성 살해 사건을 알리는 언론의 경박한 태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피해 여성에 대한 관음적 상상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예방과 해결에는 관심 없고 논란 생성만을 즐긴다. <조선일보>는 15일 ‘신당역 화장실서 여 역무원 피살, 스토킹하던 전 동료 범행이었다’ 기사에서 “두 사람이 연인관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썼다. 그 맥락 속에서 가해 남성이 불법촬영 영상물로 피해 여성을 협박했다는 사실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영상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여성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가부장제 사회는 피해자가 가해자와 어떤 관계였는지에만 얄팍한 호기심을 가진다. 이후 <조선일보>는 온라인 기사에서 해당 부분을 삭제했다.
지난 20일 오전 한 시민이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부착된 팻말 주변에 붙은 메시지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 살해를 자극적인 구경거리로 만드는 언론이 있는가 하면, 일부 정치인은 재발 방지 정책을 만드는 대신 억울하게 죽은 사람보다 치밀하게 계획적으로 살인을 범한 사람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가해자가) 청년이고 서울시민”, “부모 심정”을 언급한 이상훈 서울시 의원(더불어민주당)의 발언에 피해자의 억울함은 안중에도 없다. 여성을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이자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남자와의 사적 관계 속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피해 여성은 화장실에 가해자가 설치한 불법촬영 카메라를 발견해서 신고했고, 사건 당일에도 화장실을 순찰하던 중이었다.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노동자였다. 그의 행동은 수많은 여성이 입을 피해를 막았을 것이다. 정작 여성의 안전을 위해 여성 화장실을 순찰하던 여성 노동자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았다. 여성이 겪는 폭력 앞에서는 부재하는 하나님처럼 여성이 겪는 폭력 앞에서 부재하는 제도가 원통하다. 한 사람이 살해되기까지는 수많은 묵살과 외면이 있었다. 피해 여성은 불법촬영과 스토킹으로 남성을 고소했지만 제도가 그 신호를 무시했다. 피해자는 마지막까지 비상벨을 눌렀다.
‘일터에서의 젠더 기반 폭력’(Gender-based Violence at Work)은 오늘날 여성 노동자에게 점점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스토킹은 직장에서 재산 피해와 정신적 피해는 물론이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심각한 범죄다. 서울교통공사 노조는 신당역 사건을 ‘직장 내 성폭력에서 시작한 젠더폭력 사건’이라 정의했다. 여성의 노동권 침해는 성폭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성 노동자가 자신의 일터에서 동료 남성에게 살해되었음에도 서울교통공사는 여성 당직자 순찰을 줄인다는 차별적 해법을 내놓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일터에서 여성의 자리를 좁힌다. ‘살아서 퇴근하고 싶다’는 여성들의 소망과는 달리 아예 출근할 곳을 없애버리려 한다. 일터를 남성화하겠다는 정책이다. 폭력은 바로 이런 구조에서 자라났다.
서울교통공사는 2016년(당시 서울메트로) 채용 면접에서 의도적으로 여성 지원자의 점수를 깎아 여성 지원자를 모두 탈락시킨 적 있다. 철도공학부에서 수석 졸업을 해도 ‘여성이 하기 힘든 일’이라며 점수를 조작하면서까지 여성 지원자들을 모두 탈락시켰다. 이에 대한 감사보고서가 발표되어 진실이 드러나자 뒤늦게 탈락자들에게 입사를 제안했다. 남성은 정체성 자체가 ‘스펙’이다. 채용 성차별은 공공연하게 벌어지지만 이 심각한 문제는 정치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청년 정책의 중요한 화두가 되지 못했다. 여성을 일터에서 쫓아내는 문제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쓸모’를 오직 남성의 짝으로서 재생산에만 두고 있기에 윤석열 대통령의 10대 공약 중 여성 관련 정책은 ‘여가부 폐지’, 그리고 ‘출산 준비부터 산후조리·양육까지 국가책임 강화’였다. 화장실 불법촬영을 하는 범죄자와 여성을 출산도구로만 보는 정부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여성은 그저 생식기로만 존재한다.
지난 22일 밤 여성노동연대회의가 서울 종로구 종각 앞에서 신당역 여성 노동자 살해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공공기관과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차별적 구조를 만든다. 게다가 이 정부의 공약 중 하나는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였다. 남자를 고발하는 여성을 응징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이러한 메시지들이 모여 여성을 함부로 대하도록 만든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정부가 차별과 폭력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구조적 성차별을 부인해야 여성가족부 폐지의 수순을 밟을 수 있다. 여가부 장관은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정부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추모 현장에 붙은 포스트잇 하나하나가 이 시대 여성들의 절규다. 익명의 글귀들은 당대의 애도 문학이다. 그중에서 신당역 10번 출구에서 본 글귀가 잊히지 않는다. 남성의 ‘앞날’을 위해 그동안 희생된 여성들의 ‘앞날’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수천 송이의 꽃을 놓는다 해도 네가 걸었을 앞날보다 아름다울까.”
이라영 예술사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