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청운관에서 김진해 교수가 수업을 하고 있다. 서혜미 기자
“정말, 너희는 사랑을 제대로 못 해봤니?” 54살 김진해 교수가 물었다. 스무살 제자 이승헌씨가 반문했다. “진해는 사랑을 많이 해봤나봐?”
지난달 28일 오후 5시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청운관 305호 강의실. 프랑스 파리의 유서 깊은 카페인 카페 드 플로르 앞에서 입 맞추는 연인을 찍은 데니스 스톡의 1958년 사진을 보며 “민폐 같다”는 한 학생의 감상을 두고 ‘예의 있는 반말’이 오갔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 4시30분부터 5시45분까지 이곳에서는 높임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배와 후배뿐 아니라, 교수와 학생 사이도 마찬가지다. 김진해 교수는 이번 학기에 언어학의 주요 개념 등을 가르치는 ‘의미의 탄생:언어’ 교양강의를 맡았다. 이 강의에서는 ‘예의 있는 반말’인 평어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평어는 변형된 반말로, 반말을 하지만 상대 이름을 부를 때는 “진해야” 대신 “진해”라고 이름만 부른다는 차이가 있다.
“안녕하세요.” 이날 처음 조별 모임을 시작한 학생들은 서로 높임말로 인사했지만, “평어 사용이 원칙”이라는 김 교수 말에 화법을 바로 바꿨다. 처음 만난 조원과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자신의 학과를 소개하던 정규환(26)씨는 “수업시간에도 평어를 써서 그런지 (평어 쓰기가) 자연스러웠다”고 했다. 이정민(19)씨도 7살 많은 정씨와 평어로 대화했다. 그는 “격의 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느낄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교수에게도 평어를 쓰는 파격적 시도에 학생들 반응은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박은지(18)씨는 “개인적으로 말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사람 태도가 변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다른 교수님에게는 질문하는 게 어려웠는데, 진해 교수님과는 평어로 메일을 주고받으니 친근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김 교수에게 존댓말과 평어를 섞어 사용하던 이승헌씨는 “20년을 이렇게 살아와서 (평어를 쓰는 게) 쉽진 않지만, 다른 수업에선 무조건 교수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에 비해 평어는 의견 교류가 더 쉬운 것 같다”고 했다. 청강생 정담이(20)씨는 “친구가 인스타그램에 ‘강의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올렸다. 너무 궁금해서 두 번째 청강 중”이라고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같은 학과이지만 이날 서로 처음 대화를 나눈 학생들도 금방 편해진다는 것을 평어의 장점으로 꼽았다. 미디어학과 여윤선(23)씨는 “고학번이다 보니 같이 말을 놓자고 해도 저만 놓고 상대방은 존댓말을 계속 쓰는 불편한 상황이 지속되는 게 아쉬웠는데, 초면에 바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여씨의 과 후배인 염지원(20)씨는 “평어는 반말로 통용되지만 서로를 낮춰 부르는 게 아니라, 서로 편하고 동등하게 대하는 언어”라고 했다.
강의실 평어 사용은 “말의 틀이나 체계가 바뀌어야 관계와 생각도 바뀐다”는 언어학자 김 교수의 평소 생각과 맞닿아 있다. 김 교수는 5∼6년 전부터 출석을 부를 때 학생들에게 반말로 대답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응”이라는 한마디조차 어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김 교수는 “출석을 부른 뒤에는 다시 존댓말을 사용하니 말이 사람의 사고나 태도를 중요하게 바꾼다는 걸 학생들이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출판사
민음사에서 일부 부서가 평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전면적인 평어 사용으로 ‘강의실 질서’를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이 전면적으로 바뀐 시스템을 경험해보면, 기존 질서와 다른 질서를 (생활공간으로도) 확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했다. 김 교수의 바람처럼 강의를 들은 일부 학생은 자신의 동아리에서도 나이 차이에 관계 없이 평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이날 오후 6시 퇴근하는 김 교수에게 학생들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다음에 봐!”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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