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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퇴원하면, 한강에서 라면 먹자” 이태원에서 떠난 16살의 약속

등록 2022-11-02 07:00수정 2022-11-03 00:40

16살 희생자와 같은 병원서 만난 15살
음식물 못 넘겨 20일 동안 고생할 땐
빵에서 크림만 발라 건넨 다정한 언니
통증으로 다 포기하고 싶다고 말한 날
“포기하면 안 되지” 위로해준 사람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한 아무개(16)씨와 그의 친구 문아무개(15)씨가 지난 9월18일 나눈 인스타그램 메시지. 문양 제공.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한 아무개(16)씨와 그의 친구 문아무개(15)씨가 지난 9월18일 나눈 인스타그램 메시지. 문양 제공.

“초딩(고인의 별명)이 평소처럼 장난이었다고 해주길 바라고 또 바라면서 왔어요.”

1일 오전 서울 양천구 이대목동병원에서 만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한아무개(16)양의 친구 문아무개(15)양은 한양과 마지막으로 찍었던 동영상을 보며 쉴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동영상 속엔 병원에서 한양과 문양, 또 한 명의 친구 등 셋이 신나는 음악에 맞춰 웃으며 춤추고 있었다.

“10대 사망자가 몇 명 안 되는데, 어떻게 한명이 언니일 수 있냐고요…. 믿어지지 않아요.”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학년 한양은 12명(1일 오전 11시 기준)의 10대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이자, 이대목동병원에 안치된 7명의 희생자 가운데 유일한 10대다.

문양과 한양은 지난 6월께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처음 만났다. 지난해 갑작스럽게 문양에게 찾아온 희귀병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은 약을 먹어도 견디기 힘들었다. 극심한 통증에 수시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해하는 일도 잦았다.

한 달간 ‘병동 메이트’로 지내며 문양를 위로해주고 힘을 준 건 마찬가지로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한 한양이었다. 문양은 한양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지만, 한양을 ‘초딩’이라고 불렀다. 장난기가 많은 데다 밝고 에너지가 넘쳐서다. 둘은 한 달 동안 서로를 언니, 동생 대신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스스럼없이 지냈다. 한양은 문양이 힘들 때면 같이 ‘릴스’(인스타그램의 1분짜리 짧은 동영상)를 찍자고 하거나 함께 복도를 걷자고 하며 지친 문양에게 밝은 에너지를 줬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한 아무개(16)씨와 그의 친구 문아무개(15)씨가 지난 9월18일 나눈 인스타그램 메시지. 문양 제공.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한 아무개(16)씨와 그의 친구 문아무개(15)씨가 지난 9월18일 나눈 인스타그램 메시지. 문양 제공.

문양은 한양을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한 번은 문양이 통증 탓에 음식물을 목 뒤로 넘기기가 어려워 20일 정도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 한양이 크림이 잔뜩 든 크림빵을 사와 크림만 발라내 문양에게 건넸다. 평소 좋아했던 ‘크림치즈 스틱’도 3개를 사와 꼭 문양에게 건넬 정도로 문양을 살뜰히 챙겼다.

문양의 통증이 심해져 안 좋은 생각이 들 때면 두 사람은 같이 병원 복도를 거닐었다. 그때 “한강에서 꼭 라면을 먹자”던 약속은 끝끝내 지킬 수 없게 됐다. 문양 어머니 박아무개(51)씨는 “본인은 크림 없는 빵을 먹으면서도 크림을 챙겨줄 정도로 딸을 잘 챙겼다”며 “고마운 사람”으로 한양을 추억했다.

한양의 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다. 메이크업 자격증이 있던 한양은 이따금 문양에게 화장을 해주거나 매일 문양의 머리를 예쁘게 만져줬다. 친구들 손톱을 만져주고 가끔 아르바이트를할 정도로 네일아트 솜씨도 뛰어났다. 한양이 재학 중인 고등학교의 교감 선생님은 이날 빈소에서 조문을 마친 뒤 한양에 대해 “자기 꿈도 확실하고 재주도 많은 학생이었다”며 “학교에도 추모 공간을 꾸려 학생들 모두 애도하고 있다”고 황망한 심정을 전했다.

“제가 원래는 진짜 죽을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근데 언니가 제게 남긴 마지막 말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어요. 제가 끝까지 언니 몫까지 살아가야겠다고요. 정신과 의사가 돼서 저처럼 마음이 아픈 사람도 치료해주고 싶어요.” 지난 9월18일 ‘그냥 다 포기하고 싶을 때 어캬냐(어떻게 하냐)’는 문양의 물음에 한양은 ‘포기하면 안 되지’라고 답했다.

한양과 함께 병원에서 친구처럼 지내던 언니 박아무개(20)양은 이날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사고 당일 한양의 ‘미안하다’는 화해의 전화에 ‘용서 못한다’고 차갑게 말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태원 사고 당시 옆 건물 2층에서 사람들이 우루루 쏟아지는 모습과 심폐소생술(CPR) 하는 장면을 다 지켜봤는데, 그 자리에 친구가 있었다니 죄책감이 들어 장례식장에 차마 가지 못하고 편지를 써서 하늘로 태워 보냈다”며 “힘들어도 항상 웃는 밝은 친구였는데, 이젠 마음편히 행복한 길만 걸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한양의 가족들도 황망히 떠난 손녀를 그리워했다. 빈소를 찾은 희생자의 친할아버지 한아무개(68)씨도 “하나밖에 없는 장손”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미국과 일본 등 장기간 외국 생활로 할아버지와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명절마다 할아버지 집에 찾아와 안부를 전했던 착한 손녀였다. 한씨는 “(손녀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떨려서 잠을 하나도 못 잤다”며 “손녀가 왜소하고 작아서 더 빨리 죽은 것 같다. 남아있는 남동생은 외로워서 어떻게 하냐”고 눈물을 훔쳤다.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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