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을 찾은 이들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애도는 이야기다. 한편에서 우리는 애도하는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야기하면서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그 상실감을 달랜다. 그렇기에 장례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치르기보다는 부고를 내고 망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말로 위로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말로 위로하고 이야기하며 감각에 삶이 매몰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애도다.
다른 한편에서 애도는 그 자체로 이야기다. 말하기를 통해 상실의 시간을 견디는 것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이 애도다. 애도는 말로써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시간이다. 고전 연극부터 드라마까지 많은 이야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 남은 자가 죽은 이의 알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알아가는 것을 배경으로 한다. 때로 추리극 형태로 비밀을 알아가거나, 죽음을 통해 새롭게 삶과 세상을 인식하게 되는 깨달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애도가 이렇게 이야기일 수 있는 것은 죽은 이를 기억하며 슬퍼함으로써 그동안 알지 못하거나 간과하던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애도는 돌아가신 이의, 때로는 돌아가신 이를 통해 낯선 것(타자성)과 만나는 과정이다. 애도는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를 상실했다는 것과 함께 살아 있는 동안에 친숙하다는 이유로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한다. 그렇기에 애도는 통곡하게 된다. 진정으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그 낯선 것과 대면하는 과정이 애도다. 애도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에서 더듬으며 이야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태원 참사(이태원 참사를 ‘10·29 참사’라 하자는 제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취지가 무엇인지 이해한다. 그러나 그 이름이 과연 적합한가에는 약간의 의문과 걱정이 있어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정식으로 제안하기 전까지는 이태원 참사로 부르려 한다.) 이후, 우리는 아주 낯선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되더니 권력은 ‘지금은 추모와 애도의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참사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했다.
어찌 보면 국가가 먼저 나서서 이번 사건의 희생자들을 애도하자고 제안한 것은 지금까지 국가권력이 보인 모습과 달라 긍정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애도하자는 방식이 매우 반애도적이었다. 말하지 못하게 하고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못하게 했다. 슬퍼하는 것, 눈물을 흘리는 것만 애도로 여기고 나머지는 다 불순한 일인 양 취급했다. 말문을 막고 침묵하며 눈물만 흘리는 것. 그것이 국가가 바라는 애도였다면, 이야기를 막는 그 애도는 애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반발했지만 그 반발이 마치 애도를 거부하는 것인 양 취급했다. 정확하게 애도를 방해하는 애도가 아닌 것을 거부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번 국가애도기간에 새로운 것을 하나 배웠다. 사회적 참사를 애도할 때 그 죽음과 애도를 사적인 일로 만드는 것(안타까운 죽음이지만 수학여행 가다 벌어진, 놀러 가서 벌어진 사고이며 개인적 불운이기에 그것은 사회, 특히 정권과는 상관없다는 말들 말이다)만큼이나 애도를 국가화해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 말이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주체가 망자도 유가족도 아니라 ‘국가’(정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이 국가의 것으로 ‘회수’돼버리는 순간 그 죽음은 더 이상 이야기해질 것이 없어진다. 그저 국가의 ‘무엇’에 대한 상징으로 숭고해지기만 할 뿐이다.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의 신묘역으로 이장을 거부하며 구묘역에 남아 있는 묘들이 바로 이런 ‘숭고함’으로 국가의 이야기로 융해돼버림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분들은 자기 죽음이 국가로 ‘회수’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이야기로 남기를 바란다. 그리고 국가가 아닌 사람들(사회)이 그 이야기를 전승하고 이어가기를 바란다.
물론 이태원 참사를 국가가 숭고하게 ‘회수’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이 이번 국가애도기간이라는 숭고한 시간의 한 ‘기괴함’이기도 했다. 국무총리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굳이 참사(Disaster)라는 용어 대신 사고(Incident)라는 표현을 썼다. 이 사건을 국가가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국가의 책임이 없으며 대규모지만 우발적인 사건이었다는 것. 그렇다면 국가애도기간이 선포된 이유는 단 하나, 그 규모가 컸기 때문이지 결코 사건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11월7일 한 시민이 이태원역 1번 출구의 벽에 추모 글귀를 붙이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이런 국가의 이중적 태도는 이태원 참사의 타자성을 시민이 진정으로 대면하는 것을 방해하며 지나간 이야기만 되풀이하게 한다. 사회적 재난에서 국가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우리는 이미 그 이야기를 수차례의 사회적 재난을 겪으며 해왔다. 가장 단적으로는 세월호 참사였다. 그때 대다수 시민이 참사의 충격 속에서 “이게 국가냐?”라고 물었다. 재난을 막고 만일 재난이 벌어지면 어떻게 국가가 대처해야 하는지를 격렬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인들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려 했다. 그 이야기를 쓰는 것, 그것이 애도였다.
‘사회적 재난’이라고 하지만 모든 사회적 재난이 결코 같은 재난은 아니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시간에, 전혀 다른 사람들이 겪는 것이 재난인데 어떻게 그 재난들의 ‘본질’이 같을 수 있는가?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이 노동현장에서 당하는 산업재해라는 사회적 재난과 세월호 참사 같은 사회적 재난과 이번 이태원 참사는 전혀 같은 재난이 아니다. 각각의 재난은 일상에서 마주 대하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비켜난 전혀 다른 질문을 시민들(사회)에게 묻는다.
그 질문의 요체는 이렇다. “이런 재난을 개인적 불운이 아니라 사회적 재난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누군가는 무조건 사회적 재난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절대 국가의 세금을 쓸 수 없는 개인적 불운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것의 크기가 드러나고 결정된다. 개인과 국가로 회수되지 않고 타인의 불운에 대해 상호부조로 책임을 나누는 결속을 사회라고 말한다면 아마 이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이 곧 보이지 않던 사회의 실체와 범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애도를 통해 사회의 크기가 드러나고 만들어진다. 애도가 사회를 결정한다.
사회뿐만 아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타자성을 애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본질적 문제를 대면하면서 이 참사에 자신이 응답해야 하는 ‘윤리적 주체’가 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한다. 어떤 죽음은 사회적으로 애도돼야 하고, 어떤 죽음은 그러지 않아야 하는가? 환대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개념을 빌리면 애도에도 ‘무조건적 애도’와 ‘조건적 애도’가 있다. 무조건적 애도는 “어떠한 물음이나 조건도 없이 문을 열고” 애도하는 것이다. 이런 애도는 무조건적 환대가 그렇듯이 ‘자멸적’이다. ‘무엇을 애도하는가’ 자체가 없어지기에 이는 그저 슬퍼하는 것일 뿐 애도라고 할 수 없다.
반면 ‘조건적 애도’는 “문턱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애도다. 여기서는 “자격을 입증할 때만” 애도한다. 아무나 애도하는 게 아니라 조건적 애도에서는 자격심사를 한다. 이를 통해 개인적 불운과 사회적 재난을 갈라낸다. 이런 조건적 애도에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애도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 죽음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는데, 이 점에서 조건부 애도는 데리다가 환대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배반적 애도’라고 할 수 있다.
‘자멸’과 ‘자기배반’이라는 이율배반에서 애도는 동요한다. 동시에 이율배반은 어느 한쪽에 완전히 융해돼 결정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결정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이 결정을 내리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비결정적 측면 때문에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책임지는 것, 즉 ‘윤리적 주체’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을 윤리적 존재, 즉 결정하고 결정한 일에 책임지는 주체가 되게 한다.
국가애도기간이 끝났다. 이는 애도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던 국가의 시간이 끝났음을 뜻한다. 이제부터 이 참사의 낯선 모습과 대면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으로 애도를 시작해야 한다. 아마 이태원이라는 이방인의 공간, 핼러윈이라는 이방인의 시간, 그리고 이 시공간에서 이방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젊음이 있을 것이다. 한 번도 우리가 재난으로 만나리라고 생각해보지 못한 모습이다. 우리는 이 낯섦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이 참사를 ‘10·29 참사’라고 부르자는 제안의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태원’이라는 이름에 새겨진 이 이방인의 얼굴이야말로 우리가 만나 애도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물론 익숙한 모습도 있다. 가장 많이 반복되는 재난에서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저 아무것도 자신이 결정한 바가 없기 때문에 자기는 책임질 것이 없다고 떠드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비윤리적인 존재다. 한편에서 우리는 이들을 단죄하고 “국가란 무엇인가”를 넘어 “국가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이 익숙한 얼굴이 낯섦을 만나고 이야기할 시간을 빼앗는다. 이 지겨운 자들이 애도에 끼치는 가장 큰 용서받지 못할 해악일 것이다.
낯섦과 익숙함이 교차하는 곳에서 만들어질 이야기의 핵심은 어떤 개인적(으로 보이는) 불운에 대해서까지 사회적 일로 책임을 공유할지, 이 사회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 크기는 실망스러울 수도, 나아가 절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 결정에 책임지는 윤리적 주체로서 이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는 애도하지 않던 죽음에 대해서도 애도하게 되는 “새로운 애도를 발명해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에 있게 될 것이다.
그 크기를 결정하는 자, 그 크기의 결정(그것이 어떤 범위와 수준이든)에 책임지는 자, 나아가 그 크기가 지금 보잘것없더라도 역동성을 작동시킴으로써 가능성의 크기를 보존하는 자가 바로 공화국의 윤리적 주체, 시민이지 않은가? 이제 애도에 대한 국가의 시간을 뒤로하고 시민의 시간, 사회의 애도를 시작해야 한다. 그 역동성과 가능성의 시간이 열려야 한다. 그 열어젖히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그것이 애도의 시작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