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자 할망(84)이 자신의 집 고팡(창고)에 문을 연 올레미술관에서 멋지게 포즈를 잡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글 배워졌으면
글 배워졌으면
글 배워졌으면
글 배워졌으면
난 그것이 부러워
글은 속 안에 들지 아니하연 멍청이처럼.
그림은 그려질까. 기분이 조아. 그림은 멍청이 아니라.
살아있는동안 그림을 그릴거쥬. 90살까지.
올해 여든넷, 제주 조천읍 선흘리에 사는 고순자 할망이 쓴 글이다.
제주 4·3 때 부모님을 잃고 여기저기 피난 다니느라 공부는 둘째 치고 글도 배우지 못했다. 그런 할망이 지난해 그림 선생을 만나 그림 공부도 하고 글공부도 하며 느지막하게 배움의 재미에 빠졌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영 막(무척) 자미(재미)가 나, 이걸 기릴건가 하난, 다 그려서 붙여놓으면 배롱배롱(반짝반짝)한 게 기분이 영 좋아.” 고 할망뿐만이 아니라, 선흘리에 계신 9명의 할망들은 지난 1년 동안 매주 그림 교실에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썼다. 밭에서 일군 열무, 30년 넘게 달군 가마솥, 집 앞 50년 넘은 나무 모두가 그림 소재가 됐다. 가족들이 떠난 할망들의 텅 빈 집은 그렇게 그림들로 채워졌다. 그림 선생이었던 최소연 작가는 가정방문과 야학까지 물심양면으로 할망들을 도왔다. “새벽 4시까지 그리시기도 해요. 불면증이 있는 할머니들에게 그림이 좋은 친구가 된 거 같아요.”
홍태옥 할망(86)이 자신의 집 그림방에서 최근에 혼자 그려보았다는 말그림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백소아 기자
홍태옥 할망이 그린 귤나무 그림. 백소아 기자
‘할망해방일지’란 이름으로, 9명의 할망 화가들이 그린 100여점의 그림은 ‘특별한 미술관’에서 전시됐다. 할망들의 집, 소를 키우던 소막, 경운기가 있던 고팡(창고), 귤나무가 있는
안거리(안채) 등 마을 전체에서 11월 한달 동안 사람들에게 공개됐다.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밭일에 자식 키우느라 ‘당신’이 없었던 할망들에게 그림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해방’이었기 때문이다.
강희선 할망(86)이 소막미술관 벽에 소를 그리고 있다. 백소아 기자
강희선 할망이 그린 말그림과 어릴적 이야기. 백소아 기자
김인자 할망(84)이 자신의 집 작은방에 문을 연 `인자화실'에서 밝게 웃고 있다. 백소아 기자
할망들의 삶이 오롯이 담긴 그림에 관람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진솔한 글귀에 위로받기도 했다. 할망들은 되레 그림을 보기 위해 멀리 섬까지 온 손님들이 무척 고맙다. 전시 마무리를 앞둔 할망들은 벌써 무슨 그림을 그릴지 고민이다. 고순자 할망은 며칠 전 처음으로 물고기를 그려보기도 했다. 그림이 왜 좋냐고 물어보자 할망은 답한다.
“그림 그리는 게 막 좋아.”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2022년 11월 28일자 <한겨레> 사진기획 ‘이 순간’ 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