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구석구석 발굴단’의 최점순(가운데), 김춘선(오른쪽)씨가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성북구 동선동의 한 미용실에 위기가구 발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yws@hani.co.kr
“40년 동안 이 동네에서 안경점을 하면서 자식들 다 키웠으니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죠.”
지난달 30일 오전 11시 서울 성북구 동선동 주민센터 앞에서 만난 최점순(61)씨의 하얀 입김이 마스크를 뚫고 나왔다. 최저기온 8도를 기록한 갑작스러운 한파에도 최씨는 동선동 달동네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재개발 지구로 지정된 뒤 집주인들이 떠나간 자리를 홀로 사는 노인과 젊은 청년들이 메운 동네다. 최씨와 함께 길을 나선 동선동 토박이 김춘선(76)씨도 “어려운 세입자들이 많아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1t 트럭 한대가 겨우 들어갈 좁은 경사 골목을 힘들게 오른 이들은 빽빽이 들어선 주택들의 우체통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우편물이 쌓이거나 오래 미납된 고지서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지난달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숨진 채 발견된 모녀의 집앞에도 5개월 미납을 알리는 전기요금 고지서가 위기가구의 단서로 붙어 있었다. 최씨는 “10월 중순쯤 한 집에 우편물이 많이 쌓여 있어 집주인에게 확인한 적이 있다”며 “이미 이사한 세대의 우편물이었지만, 그 뒤에도 항상 우편물을 신경 쓴다”고 했다.
동네 사정에 밝은 최씨와 김씨는 성북구청이 운영하는 ‘구석구석 발굴단’에서 자원봉사자로 지역 위기가구를 발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지난 8월 ‘수원 세 모녀 사건’에 이어 10월 탈북 여성의 고독사, 지난달 신촌 모녀 사망 사건까지 위기가구에 해당하는 이들이 복지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숨지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자, 지방자치단체들은 주민들과 야쿠르트를 배달하는 프레시 매니저 등 관계망을 활용해 위기가구를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다. 앞선 사건들 모두 전기요금 체납 등으로 위기가구의 징후가 있었으나, 정작 현장 공무원들이 주소 변경 등의 이유로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달동네 정상의 ‘동신미용실’에서 최씨와 김씨의 발걸음이 멈췄다. 미용실에 들어간 이들은 주인에게 “파마하러 오는 손님 중에서 어려운 분이 있으면 전해달라”며 안내문을 건넸다. 미용실이나 식료품 가게처럼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찾는 가게는 위기가구 신고 방법 등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거점으로 활용된다. 평소 보이던 주민이 안 보이는 경우에 주인의 신고로 위험 징후를 포착할 수 있어서다. 성북구에서 지난 두달간 붙인 안내문과 상담 번호가 적힌 스티커를 통해 발굴된 위기 가구는 21건에 달한다.
실제 이달 1일 상담번호를 전달받은 한 노모는 “50대 아들이 사업 실패 후 우울증을 앓고 있어 극단적 선택을 할까 두렵다”며 신고하기도 했다. 동 주민센터는 자택에 방문해 상담을 진행했다.
성동구와 협약을 맺은 한국야쿠르트 프레시매니저가 요구르트를 배달하며 동네 구석구석에서 위기가구 신호를 감지해 발굴하고 있다. 1일 오후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한 독거노인 가정을 방문한 프레시매니저가 전단지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지난 1일 오전에 찾은 서울 성동구 금호2·3가동에서는 과거 ‘야쿠르트 아줌마’라고 불리던 ‘프레시 매니저’가 위기가구를 찾기 위해 탑승형 전동카트를 타고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박정순(69) 할머니가 사는 다세대주택에 도착한 프레시 매니저는 야쿠르트와 함께 위기가구 비상연락망 등의 내용이 적힌 안내문을 가지고 문 앞에 서서 말했다. “할머니 야쿠르트 배달 왔어요.”
유일한 가족인 여동생도 제주도에 있는 탓에 박 할머니는 “쓰러져도 누가 발견하지 못할까 봐 항상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달부터 정기적으로 프레시 매니저가 유산균 음료를 전달하며 안부를 묻는 덕분에 걱정을 덜었다. 성동구는 지난달 25일 에치와이(hy·옛 한국야쿠르트)와 업무협약을 맺고 ‘프레시 매니저’ 120명이 배달 업무를 하면서 위기가구의 안부를 묻거나 주변에 어려움에 처한 가구를 발견했을 때 복지 대상자들을 연계할 수 있도록 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2개월마다 전국적으로 450만∼500만건의 위기가구 정보가 입수되지만 일선 공무원들은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은 20만명 정도만 직접 찾아가 볼 수 있다”며 “(민간 관계망이) 좀더 촘촘하게 위기 가구를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빈곤에 대한 낙인이 두려워 일면식이 없거나 너무 친밀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며 “얼굴 정도만 아는 지역 주민 등이 오히려 ‘약한 연결의 힘’을 발휘해 복지 대상자를 더 잘 가려낼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위기가구 발견에 민간의 역할이 커지고는 있지만 전문 인력 확충이 병행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현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세 모녀 사건 등이 발생한 뒤에도 정부 대책엔 사회복지 인력 확충이 빠져 있다”며 “민간 네트워크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회복지 인력이 있어야 효율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