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차례로 싣습니다. <한겨레>와 <한겨레21>은 우리가 지켰어야 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이 사라진 이후 가족의 삶은 어떠한지, 유가족이 알고 싶은 진실이 무엇인지 기록할 예정입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줄 유가족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전자우편 bonge@hani.co.kr 또는 <한겨레21> 독자 소통 휴대전화(010-7510-2154).
상은은 1997년 6월29일에 태어났다. 올해 스물다섯. 어릴 때부터 밝고 예쁜 아이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잘 웃었다. 사진 찍을 때면 으레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어려서부터 친구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상은과 친구들은 고등학교 때 한 번도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2014년 상은과 같은 나이의 단원고 친구들이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뒤로.
잘 웃던 상은이 펑펑 울음을 터뜨린 날이 있었다. “아빠, 나… 합격했어!” 합격이라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상은은 휴대전화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올해 8월23일,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은 날이었다.
재수 끝에 원하던 곳이 아닌, 다른 대학에 입학한 상은은 한동안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숫자에 친숙하기보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상은이 막연하게 선택한 전공은 마케팅과 영상이었다. 대학교 3학년, 상은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미국 미주리주에 있는 한 시골 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뒤 꿈이 생겼다.
“엄마, 나 직장을 다니든 뭘 하든 미국에서 살아보고 싶어.” 회사에서 재무 쪽 일을 하는 엄마 강선이(52)씨는 미국 공인회계사 시험을 추천했다. “상은아, 미국 공인회계사 공부를 해보는 건 어때? 한국 공인회계사 시험보다는 덜 어려울 거야. 물론 언어가 문제지만 그것도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019년 12월, 한국에 돌아온 상은은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상은과 엄마는 ‘삼식이 파트너’가 됐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하는 엄마와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와서 식사하던 상은은 매일같이 아침·점심·저녁 세끼를 함께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오늘은 뭐 먹을까?’ 둘이 함께 고민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상은과 엄마 아빠 세 식구가 모여 고기와 맥주를 먹는 ‘고기데이’ 날도 가졌다. 그런 날이면 상은은 시험 이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곤 했다.
“취업하면 먼저 연애부터 할 거야. 결혼도 빨리 하고 싶어. 결혼식은 성당에서 올리면 좋겠다. 아, 친구들이랑 해외여행도 가고 싶어.” 2년6개월 동안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차곡차곡 쌓은 상은의 ‘버킷리스트’는 차고 넘쳤다.
상은은 대학 졸업 전에 시험에 합격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시험 합격은 쉽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숫자에 약한 걸까’ ‘영어가 문제일까' 고민하다 중간에 몇 개월 동안 공부를 포기하기도 했다. 기약 없이 길어지는 공부에 결국 졸업부터 했다. 그리고 8월23일, 졸업식 나흘 뒤에 합격 소식을 들었다.
합격 이후, 상은은 어릴 때 배운 발레를 다시 시작했다. 독서모임에도 들어갔다. 주말엔 평양냉면 먹으러, 매운탕 먹으러 엄마 아빠와 맛집 여행을 떠났다.
핼러윈 며칠 전부터 상은은 엄마에게 계획을 말했다. “친구랑 이태원 가서 놀고 올게.” 상은은 이태원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종종 이태원에서 어울렸다. 회계사 온라인 시험 장소도 이태원 근처 한남동이었다. 시험을 치른 날이면 엄마랑 같이 이태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초등학교 때 엄마와 홍콩에서 1년가량 살았던 상은에게 핼러윈은 행복한 기억이었다. 교환학생 시절 미국에서 친구들과 핼러윈을 즐길 때 입었던 원피스 의상을 이번에도 준비했다.
그날 새벽, 강선이씨는 남편 이성환(56)씨와 일찍 집을 나섰다. 딸은 아직 잠든 시간. 부부는 지인들과 함께 등산하러 강원도로 향했다. 아침에 상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은 먹었어?” ”이태원 가면 재밌게 놀아야 하니까, 엄마 저녁엔 전화하지 마.” 상은이 즐겁게 핼러윈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에, 엄마는 평소처럼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날 밤 10시, 엄마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6시가 넘어, 강원도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켠 엄마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수백 명이 넘어져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정신없이 상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분명 ‘사랑하는딸’이라는 이름이 뜨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용산경찰서였다. “우리 딸은 어디에 있어요?” “저희는 현장에서 물품만 수거해와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디에 휴대전화를 떨어뜨리고 집에 가서 자고 있겠지.’ 이웃에게 부탁해, 상은이 집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엄마 아빠는 그길로 서울로 향했다. 한남동 주민센터에서도, 순천향대병원에서도 상은을 찾을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다시 찾아보자고 하던 찰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동대문경찰서입니다. 1997년 6월29일생 이상은씨 부모님 휴대전화 맞습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 상은이인 줄 어떻게 알아요?” “지문으로 확인했습니다.”
강씨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편 이씨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동대문구의 한 병원으로 안내했다. 안치실에 딸이 누워 있었다.
그 뒤로 어떻게 장례식장이 차려졌는지, 엄마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경찰에서 두어 번 더 전화가 와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서울시 쪽은 빈소를 찾아 장례 절차와 관련한 이야기를 했다. 보건소는 정신상담 도움을 원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빈소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딸의 죽음을 믿지 못했다. 수십 명의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이건 거짓말이라고, 우리 상은이가 아직 안 갔다고….’ 엄마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발인하고 나서야 머릿속에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오후 6시부터 112 신고가 있었다는데 왜 아무런 조치가 없었는지, 왜 이태원역은 무정차 통과를 하지 않았는지, 직장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최고책임자가 책임지는데 왜 대통령은 사과도 없는지.
얼마 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주최로 열린 유가족 기자회견에서, 상은의 아빠는 외동딸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상은아, 잘 가라. 뒤돌아보지 말고 이승에서 아픔, 슬픔 모두 버리고 힘내서 잘 가거라. 우리 딸이어서 너무 고마웠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 하지만 아직 엄마 아빠는 마음으로는 보내지 못했다. 상은의 방도 치우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는 상은이 보던 책이 놓여 있다. 벽 한쪽엔 ‘TOEIC 945' 등 목표를 적은 쪽지 13개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다. 하나씩 이뤄갔던 목표는 마지막 13번째 ‘취업’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방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게 많던 상은의 버킷리스트도 10월29일 이태원에서 멈췄다.
류석우 <한겨레21> 기자
raintin@hani.co.kr
아래는 이상은씨 아버지가 외동딸에게 보낸 편지. 손으로 직접 쓴 편지 전문을 사진으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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