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북경으로 떠나기 전 친구들과 사촌들에게 나누어준 이육사 본인 사진(왼쪽)과 이육사의 또 다른 필명인 ‘이활(李活)’로 쓴 서명.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첫 시 ‘말’은 필명 ‘이활(李活)’로 실렸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오늘로부터 93년 전인 1930년 1월3일, ‘말’이라는 제목의 시가 <조선일보>에 게재되었습니다. 작가명 ‘이활(李活)’로 실린 이 시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첫 시입니다. 민족저항 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는 무장 독립투사로 활동하며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부터 베이징 감옥에서의 순국까지 ‘초인(超人)’과 같은 삶을 살다간 이육사의 이야기들을 들여다 봤습니다.
1927년 첫 옥살이(23살), 그리고 수감번호 ‘264’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첫 시. 그의 또 다른 필명인 ‘이활(李活)’로 실렸다. <조선일보> 1930년 1월3일 치.
당시 조선은행 대구지점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1927년은 이육사가 첫 옥살이를 하며 혹독한 고문에 시달린 해입니다. 당시 23살의 이육사는 중국 베이징을 다녀온 뒤 독립활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0월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장진홍 의거’로 세상에 알려진 사건입니다. 당시 독립운동가 장진홍은 일제 수탈의 상징이었던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 소포를 배달해 폭파를 시도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범행의 단서를 잡지 못하자 대구를 중심으로 독립활동을 하던 인물들을 잡아들여 고문으로 진범을 꾸며 냈습니다. 이육사도 그의 형(이원기), 동생(이원일, 이원조) 등과 함께 공범으로 엮여 1년7개월 동안 무고하게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대구폭탄사건(장진홍 의거) 예심결정서. 이원록(이육사의 본명)을 비롯해 이원기(이육사의 형), 이원유(이육사의 동생) 등의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기소를 면한다 내용이 담겼다. <조선일보> 1929년 12월23일치.
‘장진홍 의거’ 후 1년4개월이 지난 1929년 2월14일, 장진홍이 일본 오사카에서 체포되면서 이육사 일행이 의거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석방된 판결문을 보면 ‘(검찰이) 공판에 회부한 범죄의 혐의가 없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습니다. 하지만 이육사 일행은 1929년 5월 면소 판결까지 장기간 미결수 생활을 해야 했고,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무혐의로 종결되었습니다.
한편 이때의 수감번호인 ‘264’는 시인 이육사의 필명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이육사’는 한자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을 담았는데 戮(죽일 육) 史(역사 사)는 ‘역사를 찢어 죽이겠다’며 일제의 역사를 부정하는 의미로 썼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체포를 염려한 집안 어른의 권유로 뜻을 순화한 陸(육지 육) 史(역사 사)를 사용하게 됩니다. 또 이후에는 肉(고기 육) 瀉(설사 사) 즉,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한자로 일제 강점 상황을 비아냥대는 뜻을 담기도 했습니다.
1930년 첫 시 <말> 발표(26살)
흣터러진 갈기
후즈군한 눈
밤송이 같은 털
오! 먼 길에 지친 말
채찍에 지친 말이여 !
수굿한 목통
축 처진 꼬리
서리에 번쩍이는 네 굽
오! 구름을 햇치려는 말
새해에 소리칠 흰 말이여!
-‘말’ 이활(李活)-
꾸준히 저항시를 썼던 이육사는 순국하는 그 날까지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은 바로 1930년 1월3일 <조선일보>에 게재된 시 ‘말’입니다. 내용을 보면, 1연에서 ‘힘겹고 고달픔에 지친 말’이 2연에서는 ‘도약을 준비하는 늠름한 말’로 표현돼 현실 극복과 함께 미래지향적인 의지와 신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던 당시 억압당한 우리 민족의 내적 자아와 자유를 향한 염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해석됩니다.
이육사는 일제강점기 문인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애국과 독립운동을 한 인물입니다. 첫 시 ‘말’ 이후 일제 통치에 저항하는 시 ‘광야’, ‘청포도’, ‘절정’ 등을 포함해 총 40여 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육사는 또 일제가 한글 사용을 규제하자 이에 저항해 한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는 많은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의 물결에 휩쓸려갈 때도 강건히 지켜낸 민족의 양심이자 조국 광복을 향한 그의 의지가 담긴 행동이었습니다.
이육사의 친필을 확인할 수 있는 미발표 유고시 ‘바다의 마음’(왼쪽)과 ‘편복’ 원고. 이 ‘편복’은 일경에 압수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되찾은 것이다. ‘편복’은 ‘박쥐’를 일컫는 한자어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40년의 짧은 생 동안 옥살이만 17번
1934년 6월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된 이육사의 신원카드(왼쪽)와 신원카드 사진. 이육사문학관 제공
이육사는 40년이라는 짧은 생 가운데 20년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17번의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1927년 ‘장진홍 의거’로 첫 옥살이를 한 그는 1931년에는 ‘대구격문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후 더욱 거세진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무장투쟁에 대한 그의 의지는 굳건했습니다. 마침내 이육사는 1932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합니다. 이곳에서 탄약, 폭탄, 뇌관 제조법 등을 비롯한 군사학을 교육받으며 독립군 초급장교로 거듭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1934년 3월 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다시 한 번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거듭된 옥살이에도 이육사는 문단 활동과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의 대열로 뛰어들었습니다.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40살)
‘이육사 순국지’로 알려진 옛 일본군 헌병대 건물. 연합뉴스
이육사는 1943년 4월 무장투쟁의 의지를 품고 다시 중국으로 출국합니다. 베이징에서 독립활동 동지들을 만나고 무기를 반입해 들여오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7월 모친과 맏형의 첫 제사를 치르려고 잠시 귀국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맙니다. 이후 20여 일 동안 구금된 그는 베이징으로 다시 끌려가게 됩니다. 당시 이육사는 폐렴을 앓고 있었습니다. 쇠약해진 건강상태로 일제의 모진 고문까지 견뎌야 했습니다. 결국, 이듬해인 1944년 1월16일 이육사는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39년 8개월의 삶, 마흔 살도 채 안 된 나이였습니다.
(왼쪽 사진) 한복을 입은 이육사(오른쪽) 시인의 사진. 함께 찍은 사람은 동생 이원일과 친구 조규인이다. (오른쪽 사진) 이육사의 형제들. (원창, 원일, 원조(왼쪽부터). 이육사문학관 제공
이육사가 순국하고 해방된 지 넉 달 후 그의 동생 이원조에 의해 유작 ‘광야’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빌 광(曠)’ ‘들 야(野)’로 모든 걸 빼앗겨 버린 ‘빈 들판’을 노래한 시였습니다. 이육사는 1942년 베이징 감옥에서 일제의 고문을 견디며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중략)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현실 극복의 의지와 함께 미래에 대한 기대와 확신을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여기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민족의 이상을 실현해줄 구원자(또는 미래 역사의 주인공인 후손)로 해석됩니다. 화자가 그토록 기다린 ‘초인’은 어쩌면 평생을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이육사 자신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문헌
김용균, 「불꽃으로 살고 별빛이 되다」, 여름언덕, 2022, P.186-187, 191
<조선일보> 1929년 12월23일 치, 1930년 1월3일치
이육사문학관 http://www.264.or.kr/board/index.php
사진
이육사문학관, 독립기념관, 연합뉴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