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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어떤 사랑도 죄일 리 없다…그 사랑은 온당하며, 옳다

등록 2023-01-14 16:00수정 2023-01-15 09:27

[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삶, 노련해지고 있습니까?
이따금 과도한 장난은 우리 부부가 서로를 지키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림 박조건형
이따금 과도한 장난은 우리 부부가 서로를 지키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림 박조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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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이, 결국 ‘노련함’이란 걸 알겠다. 시간과 실패가 필요한 일이다. 직접 맞닥뜨리거나 그 앞에 서지 않고 쌓이는 노련함이란 건 없었다. ‘이미 알고 있어, 나는 정답을 알아, 그건 바보짓이야.’

우리의 성공은 여러 차례 자신감과 오만 사이에서 자라났고, 운이 좋아 낚아챈 결과를 ‘노련해진 덕분’이라고 믿고 만다. ‘나는 쉽던데, 너는 왜 어렵니? 그렇게 나약해서 쓰겠니?’ 힘과 권력에 도취된 오만함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치열한 사람들을 폄하한다. 권력과 돈이, 출신과 직업이 성공의 기준으로 확언되는 시대에, 도처에는 정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뿐이다. ‘각자도생’이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구하려는 절절한 선언인데, 약자를 탈락시키고 제 것만 지키기 위해 함부로 남용된다. 그들은 노련해졌나, 그들의 노련함은 그들만이라도 구할 수 있는 게 맞나? 자신의 노련함만 부풀리기 위해 혈안이 된 나약한 자들이 모인 사회의 결말은 바람직할 수 있을까?

들꽃이 핀 초록 들판에 수도꼭지가 불쑥 솟아 있었다. 흉물스럽다기보다는 아름답게 보였다. 김비 제공
들꽃이 핀 초록 들판에 수도꼭지가 불쑥 솟아 있었다. 흉물스럽다기보다는 아름답게 보였다. 김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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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태어나 보니 자신이 불리한 자리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노련해질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가진 것과 그들이 가진 것 사이의 격차는 명확해질 것이다.

가난이 얼마나 촘촘하게 한 인간을 갉아먹는지 실감해본 적 없으면서, 다 아는 척 자신만의 합리와 싸구려 연민을 설파하는 얼굴들을 견뎌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 그래도 밝은 생각, 긍정적 태도 운운하는 ‘좋은 사람들’을 매 순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박탈감이나 피해의식은 지독하게 일상의 몸을 휘감으며 자라고, 아닌 척해야 하는 위선적인 자신을 견뎌야 하는 것조차 자기 몫이다. ‘없는 집 애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을 향한 근거 없는 낙인은 ‘진리’라도 되는 듯 끝도 없이 복제된다. 생각 없는 댓글들로 비합리적 추측들이 확인되어 진실이 되고, 다시 또 부당한 낙인은 거침없이 퍼져나간다. 글자로 기록된 말들은 선명하고, 그 한 문장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자신은 참혹해진다.

내가 전할 수 있는 한 가지 조언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고 분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큰 꿈을 가지라’는 말의 효용은 더 이상 보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할 수 없는 것’의 목록에 많은 것들을 담아야 할 때, 차마 그러기 쉽지 않은 것까지 밀어 넣을 때, 좌절하고 낙담하는 시간은 최대한 짧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까지 삭제하지는 마시라. 살아 보니 삶이란 매 순간 서로 다른 가능성의 경합이었다. 어떤 가능성 위에 어떻게 올라타느냐는 결국 그 순간에만 가능한 판단이었다. 그러니 어느 쪽 목록이라도 가능성이란 단어는 괄호 안에 그대로 남겨두시라. 어느 삶이든 어느 때든 가능성은 평등하게 다가올 테니 말이다.

오히려 좌절하지 말라는 조언 따위 귀담아듣지 않아도 되는지 모른다. 좌절이나 낙담은 당연하다. 그 감정조차 틀어막혀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짧게 했으면 한다. 좌절이나 낙담에 쏟은 시간은 지나고 보니 너무 아깝다. 바꿀 수 없는 것, 가능하지 않은 것을 붙들고 끙끙대기만 한 일은 그 시절 평등해야 마땅한 청춘의 시간에 크나큰 낭비였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할 수 있는 소중한 것들’에 몰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결핍이란 ‘무’가 아니라 ‘유’의 목록이니, 어떤 결핍도 당신의 손안에 무언가를 쥐여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퀴어라면 아마 더 지독할 것이다. 이제 환경적 결핍뿐 아니라, 감정 혹은 욕망에 관한 결핍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온당한 나의 감정이나 욕망이 폄훼될 때, 공공연히 축하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랑이 오직 내 것만은 그럴 수 없을 때, 그 격차를 확인한 자괴감은 끝도 없이 한 인간의 존재를 나락으로 밀어 넣으려고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오만함’의 일부를 빌려 와야 한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고립시킨 것이라고 믿는 억지 같은 힘이 필요하다. 어차피 일평생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란 한두명.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추동되는 사랑의 정의로부터 과감하게 자신을 탈피시켜도 괜찮다. 지극히 개인적인 목록에 해당되어야 할 그 정의를 보편에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의뭉스러웠다는 걸 일찍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랑도 죄일 리 없고, 누군가를 특별히 더 귀하게 여기고픈 마음은 상대와 자신을 동시에 성숙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 사랑은 옳다. 끙끙 앓을 필요 없다. 그 사랑은 온당하며, 옳다.

부산 어느 골목 너무 많은 표지판을 지닌 길을 만났다. 나는 표지판에 없는 길로 갔다. 김비 제공
부산 어느 골목 너무 많은 표지판을 지닌 길을 만났다. 나는 표지판에 없는 길로 갔다. 김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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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척해 봐야, 몸 하나에 묶인 생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제 몸에 관한 노련함이 필요한 때라는 걸 절감한다. 성별과는 상관없이, 몸 말이다. 과거에 했던 수술이나 치료가 내 건강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지연시켜왔음을 알게 된다. 나에게는 성 확정 수술이 그럴 텐데, 그때에도 나는 그것이 나를 여성으로 만드는 수술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요즘의 몸은 자꾸 나를 쓸쓸하게 한다.

아무리 잘난 척해 봐야, 몸 하나에 묶인 생이란 걸 절감한다. 이 몸 중 어느 걸 어떻게 토닥거려 최대한 온전하게 가져가야 할지 자주 생각한다. 아직 오십 초반에 불과한데 또 육십 칠십에는 어떤 몸이, 어떤 놀라움으로 내 앞에 다가올까? 최소한 스물이나 서른의 안일함은 아닐 테니, 다행이라고 겨우 위로한다. 수십년 동안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워했던 신랑도, 이제 조금 노련해졌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나는 두 손 들어 조금은 노련해진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건물을 지을 때 필요했을 기호가 문학 모임 공간 바닥에 그대로 남았다. 초심의 일부일 것이다. 김비 제공
건물을 지을 때 필요했을 기호가 문학 모임 공간 바닥에 그대로 남았다. 초심의 일부일 것이다. 김비 제공

그는 나에게 “병필아!”라고 내 남자 시절의 이름을 거침없이 불러댄다. 여전히 흠칫흠칫 놀라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그때의 기억이 인장처럼 내 몸 구석구석 남아 잠깐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이제 나도 조금은 노련해졌으니 노련한 나를 믿어 본다. 절망에 침잠하지 않고, 낭비하지 말아야 할 시간과 사람이 여기 내 앞에 있으니,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위해 노련해져야 한다. “병필아!” 놀리는 그를 쫓아가 발길질을 하고, 몸으로 그를 깔아뭉개고, “어이, 김병필!” 다시 또 도망치며 놀리는 그를 끝까지 따라가 헤드록을 걸면서도, 그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다. 사람 사회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만큼 쓸모 있는 노련함이 있을까? 아주 사소하고 모호하지만, 우리를 살게 하는 고집스러운 노련함. 그러고 보니, 쓸모 있는 노련함이란 실패를 극복하면서 지켜진 ‘초심’을 닮았다.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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