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김비의 달려라 오십호(好)
삶, 노련해지고 있습니까?
삶, 노련해지고 있습니까?

이따금 과도한 장난은 우리 부부가 서로를 지키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림 박조건형

들꽃이 핀 초록 들판에 수도꼭지가 불쑥 솟아 있었다. 흉물스럽다기보다는 아름답게 보였다. 김비 제공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태어나 보니 자신이 불리한 자리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노련해질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가진 것과 그들이 가진 것 사이의 격차는 명확해질 것이다. 가난이 얼마나 촘촘하게 한 인간을 갉아먹는지 실감해본 적 없으면서, 다 아는 척 자신만의 합리와 싸구려 연민을 설파하는 얼굴들을 견뎌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 그래도 밝은 생각, 긍정적 태도 운운하는 ‘좋은 사람들’을 매 순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박탈감이나 피해의식은 지독하게 일상의 몸을 휘감으며 자라고, 아닌 척해야 하는 위선적인 자신을 견뎌야 하는 것조차 자기 몫이다. ‘없는 집 애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을 향한 근거 없는 낙인은 ‘진리’라도 되는 듯 끝도 없이 복제된다. 생각 없는 댓글들로 비합리적 추측들이 확인되어 진실이 되고, 다시 또 부당한 낙인은 거침없이 퍼져나간다. 글자로 기록된 말들은 선명하고, 그 한 문장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자신은 참혹해진다. 내가 전할 수 있는 한 가지 조언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고 분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큰 꿈을 가지라’는 말의 효용은 더 이상 보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할 수 없는 것’의 목록에 많은 것들을 담아야 할 때, 차마 그러기 쉽지 않은 것까지 밀어 넣을 때, 좌절하고 낙담하는 시간은 최대한 짧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까지 삭제하지는 마시라. 살아 보니 삶이란 매 순간 서로 다른 가능성의 경합이었다. 어떤 가능성 위에 어떻게 올라타느냐는 결국 그 순간에만 가능한 판단이었다. 그러니 어느 쪽 목록이라도 가능성이란 단어는 괄호 안에 그대로 남겨두시라. 어느 삶이든 어느 때든 가능성은 평등하게 다가올 테니 말이다. 오히려 좌절하지 말라는 조언 따위 귀담아듣지 않아도 되는지 모른다. 좌절이나 낙담은 당연하다. 그 감정조차 틀어막혀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짧게 했으면 한다. 좌절이나 낙담에 쏟은 시간은 지나고 보니 너무 아깝다. 바꿀 수 없는 것, 가능하지 않은 것을 붙들고 끙끙대기만 한 일은 그 시절 평등해야 마땅한 청춘의 시간에 크나큰 낭비였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할 수 있는 소중한 것들’에 몰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결핍이란 ‘무’가 아니라 ‘유’의 목록이니, 어떤 결핍도 당신의 손안에 무언가를 쥐여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퀴어라면 아마 더 지독할 것이다. 이제 환경적 결핍뿐 아니라, 감정 혹은 욕망에 관한 결핍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온당한 나의 감정이나 욕망이 폄훼될 때, 공공연히 축하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랑이 오직 내 것만은 그럴 수 없을 때, 그 격차를 확인한 자괴감은 끝도 없이 한 인간의 존재를 나락으로 밀어 넣으려고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오만함’의 일부를 빌려 와야 한다. 내가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고립시킨 것이라고 믿는 억지 같은 힘이 필요하다. 어차피 일평생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란 한두명.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추동되는 사랑의 정의로부터 과감하게 자신을 탈피시켜도 괜찮다. 지극히 개인적인 목록에 해당되어야 할 그 정의를 보편에 끼워 넣으려는 시도 자체가 의뭉스러웠다는 걸 일찍 깨달아야 한다. 어떤 사랑도 죄일 리 없고, 누군가를 특별히 더 귀하게 여기고픈 마음은 상대와 자신을 동시에 성숙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 사랑은 옳다. 끙끙 앓을 필요 없다. 그 사랑은 온당하며, 옳다.

부산 어느 골목 너무 많은 표지판을 지닌 길을 만났다. 나는 표지판에 없는 길로 갔다. 김비 제공
잘난 척해 봐야, 몸 하나에 묶인 생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제 몸에 관한 노련함이 필요한 때라는 걸 절감한다. 성별과는 상관없이, 몸 말이다. 과거에 했던 수술이나 치료가 내 건강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지연시켜왔음을 알게 된다. 나에게는 성 확정 수술이 그럴 텐데, 그때에도 나는 그것이 나를 여성으로 만드는 수술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요즘의 몸은 자꾸 나를 쓸쓸하게 한다. 아무리 잘난 척해 봐야, 몸 하나에 묶인 생이란 걸 절감한다. 이 몸 중 어느 걸 어떻게 토닥거려 최대한 온전하게 가져가야 할지 자주 생각한다. 아직 오십 초반에 불과한데 또 육십 칠십에는 어떤 몸이, 어떤 놀라움으로 내 앞에 다가올까? 최소한 스물이나 서른의 안일함은 아닐 테니, 다행이라고 겨우 위로한다. 수십년 동안 우울증으로 고통스러워했던 신랑도, 이제 조금 노련해졌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나는 두 손 들어 조금은 노련해진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건물을 지을 때 필요했을 기호가 문학 모임 공간 바닥에 그대로 남았다. 초심의 일부일 것이다. 김비 제공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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