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니마을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이 7일 오후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국가배상소송 1심에서 승소한 뒤 변호인단이 노트북으로 연결한 화상 통화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국은 현대사의 비극인 전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7일 우리 사법부가 사건 발생 55년 만에 처음으로 베트남전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본 민간인의 국가 책임을 인정하면서, 한국은 그동안 외면해온 역사의 상처를 되돌아볼 기회를 갖게 됐다.
이날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의 국가배상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민간인 학살 범죄에 시효란 없다’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법정에서 확인했다. 재판부는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지나 설사 불법 행위가 인정되더라도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한국 정부의 주장에 대해 “이 사건 피고(대한민국)가 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손해배상청구 등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 사유가 있는 경우, 국가가 소멸시효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정부의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어 응우옌티탄의 진술과 마을 주민, 당시 참전군인 등의 증언을 토대로 민간인 학살 사실을 대부분 인정했다. 재판부는 “1968년 2월12일 아침 10시30분부터 낮 3시 사이, 작전을 수행하던 한국 군인들이 원고의 가족을 집 밖으로 나오도록 명령하고 총격을 가한 사실이 인정된다. 원고의 이모, 사촌동생, 언니, 남동생 등은 현장에서 숨졌고 원고와 오빠는 총격으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며 “이와 같은 행위들은 명백한 불법 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용기를 냈다. 퐁니마을에서 작전을 수행했던 청룡부대 소속 파병군인 류아무개씨는 2021년 11월 증인으로 출석해 “중대원들이 민간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중대장이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해 살해했다고 들었다”며 “군인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죽인 장면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베트남인 증인이자 원고 응우옌티탄의 삼촌 응우옌득쩌이도 지난해 8월 한국 법정을 찾아 “학살 장면을 목격했고, 나중에 미군과 함께 마을로 들어가 주검을 수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들의 증언을 모두 부인했다. 피고 대한민국을 대리한 정부법무공단은 “베트콩이 한국 군인으로 위장했거나 북한 심리전 부대의 개입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한국 군복을 입고 베트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진술만으로 가해자가 한국 군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만약 한국 군인들이 민간인을 살인, 상해했더라도 게릴라전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하는 베트남전쟁에서는 정당 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내놨다.
이 밖에도 한국 정부는 소송 과정 내내 진실을 찾기위한 노력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앞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국가정보원을 상대로 1969년 당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관련자 조사 자료를 공개하라는 소송을 낸 바 있다. 대법원은 “대한민국 정부가 학살 사건에 관해 관련자를 조사했는지 여부 등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서 의미가 있어 공개할 가치가 인정된다”며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국정원이 공개한 자료는 당시 퐁니마을에 있었던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 소속 1대대 1중대 소속 소대장 3명의 이름과 주소 등 명단 뿐이었다. 이에 이 사건 재판부가 국정원에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장병들에게 퐁니·퐁넛 사건을 조사한 기록 일체를 공개해달라”는 사실조회를 요청했지만, 국정원은 사실상 거부 취지의 회신서를 법원에 제출하고 끝내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한편, 이날 판결을 계기로 베트남 각지에서 벌어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잇따를 가능성도 높아졌다. 추가 피해자들의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도 있다. 앞서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는 지난해 4월 베트남 ‘하미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한 바 있다. 이 사건은 1968년 베트남 꽝남성 하미마을에서 민간인 135명이 한국군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건이다. 그러나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조차 하지 않고, 사건 처리 자체를 보류하고 있는 상태다. 네트워크의 심아정 활동가는 이날 <한겨레>에 “하미마을 사건 관련 진정인들은 소위원회 면담 요청도 한 바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베트남 전쟁 학살에 대한 법원 판결도 나온 만큼 진실화해위도 조속히 조사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 장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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