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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한국 온 트뤼도가 참배한 ‘석호필’ 애국지사는 누구

등록 2023-05-17 14:31수정 2023-05-18 16:46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 캐나다인 스코필드 박사
3·1 독립선언서 영문번역·현장촬영…현충원 안장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운데)가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고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묘역에서 참배 후 멜리나 졸리 캐나다 외교장관(오른쪽), 필립 샴페인 캐나다 혁신과학산업장관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운데)가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고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묘역에서 참배 후 멜리나 졸리 캐나다 외교장관(오른쪽), 필립 샴페인 캐나다 혁신과학산업장관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한국을 찾은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17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웠던 캐나다인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묘역에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한국명 석호필’로 알려진 스코필드 박사는 어쩌다가 이역만리 한국땅에 묻혔을까?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거사를 미리 알고 있었던 유일한 외국인이다. 수의학자였던 그는 1916년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서 식민지 조선에 들어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았다. ‘석호필’이라는 한국 이름도 이때 지었다. 3·1운동이 벌어지기 하루 전날인 2월28일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던 이갑성 선생이 독립선언문을 들고 찾아와 영어 번역을 요청하면서, 스코필드 박사는 식민지 조선 역사의 소용돌이에 발 디디게 됐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오른쪽)와 그의 한국어 선생 목원홍 선생.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오른쪽)와 그의 한국어 선생 목원홍 선생.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스코필드 박사는 거사 당일 자전거를 타고 만세시위 현장에 나가 사진을 찍으며 3·1운동의 ‘산증인’이 됐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3·1운동 초기 사진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그 뒤에도 유관순 열사 등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을 면회해 전 세계에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그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의 민족대표에 이어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린다.

스코필드 박사가 1919년 3월1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촬영한 3·1운동. 독립기념관 제공
스코필드 박사가 1919년 3월1일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촬영한 3·1운동. 독립기념관 제공

같은 해 4월15일 벌어진 ‘제암리 학살 사건’도 스코필드 박사가 기록한 일제 만행 중 하나다. 3·1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4월15일, 일본군은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수원 제암리 주민 30여명을 교회에 가두고 불태워 학살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학살 현장을 직접 찾아 곳곳을 조사하고 이를 보고서로 남겨 사건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금도 경기도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입구에는 카메라를 든 스코필드 박사의 동상이 놓여있다.

스코필드 박사가 쓴 ‘제암리 대학살’ 보고서.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스코필드 박사가 쓴 ‘제암리 대학살’ 보고서.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일제의 미움을 산 스코필드 박사는 감시와 살해 위협에 시달리다 1920년 캐나다로 귀국했다. 캐나다에서도 강연과 기고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알리던 그는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해방된 대한민국’에 돌아왔다.

해방된 뒤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에 실망한 스코필드 박사는 <조선일보>에 “민심은 공포에 잠겨있다. 의사당 앞에 무장경관이라니”라는 글을 기고해 이승만 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1958년 서울 중구 이화여고 노천강당에서 열린 스코필드 박사 환영회. 스코필드 박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1958년 서울 중구 이화여고 노천강당에서 열린 스코필드 박사 환영회. 스코필드 박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공훈전자사료관 제공

줄곧 한국에 머무르며 서울대 수의과대학 수의병리학 교수로 지낸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의 아이들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고아원 두 곳과 직업학교를 꾸준히 지원하고 형편이 어려운 중·고등학생들의 학비도 댔다. 정운찬 전 총리도 스코필드 박사의 재정 지원을 받은 수혜자 중 하나다.

1968년 스코필드 박사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고 1970년 81살을 일기로 서거했다. 그의 유해는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 주세요”라던 그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스코필드 박사의 묘비에는 “캐나다인으로 우리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생애를 바치신 거룩한 스코필드 박사 여기에 고요히 잠드시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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