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인 캄보디아 아내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를 확정받은 남편이 보험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심에 이어 2심도 이겼다.
서울고법 민사13부(재판장 문광섭)는 지난 19일 이아무개(53)씨가 교보생명을 상대로 낸 보험금 청구 소송에서 “이씨에게 2억300만원을, 이씨의 자녀에게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3일 밝혔다.
이씨는 2014년 8월23일 2톤 차량을 운전해 시속 60~70㎞ 속도로 고속도로 5차를 달리다가 갓길에 주차된 8톤 화물차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조수석에 탔던 임신 7개월의 아내(당시 24살)가 숨졌다. 아내는 캄보디아인으로 2008년, 만 18살에 이씨와 결혼했다.
검찰은 이씨가 2008∼2014년 아내를 피보험자로, 자신을 수익자로 한 보험 33건에 가입한 점 등을 근거로 살인·보험금 청구 사기 등 혐의로 이씨를 재판에 넘겼다. 보험금은 원금만 95억원, 지연이자를 합치면 100억원이 넘었다. 매월 납입 보험료도 427만원이나 됐다. 이씨는 졸음운전 중 발생한 사고라고 주장하며 살인 혐의를 부인했다. 1심, 2심, 3심에 이어 파기환송심, 재상고심까지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법원은 “범행동기가 선명하지 못하다”며 살인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다만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만 유죄로 인정했다. 운전 중에 주의의무를 다하지 못해 사망 사고를 냈다는 뜻이다. 이씨는 2021년 3월 징역 2년형이 확정됐다.
보험사들이 살인 혐의로 재판받았다는 이유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자 이씨는 민사소송을 냈다. 교보생명을 상대로 낸 보험금 소송에서 1심, 2심 모두 “이씨가 보험금을 부정 취득할 목적으로 보험 계약을 맺었거나 일부러 교통사고를 일으켰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가 꼽은 부정 취득할 목적으로 보험 계약을 맺지 않았다는 근거는 여섯 가지였다. ①아내가 피보험자로 가입한 보험은 교통사고가 임박한 때 집중적으로 가입한 것이 아니라 결혼한 2008년부터 2014년까지 매년 꾸준히 가입한 것이다. ②가입한 보험 대부분은 순수하게 사망을 보장하는 목적이 아니라 질병 치료 등 다른 재해사고도 함께 보장하거나 투자·예적금 기능도 갖고 있다. ③이씨는 아내뿐 아니라 본인 및 다른 가족들을 피보험자로 한 다수의 보험계약을 체결했다. 이씨 본인을 피보험자로 둔 계약은 55건, 아버지는 2건, 어머니는 4건, 큰딸은 14건, 작은딸은 12건 등이다. ④보험설계자의 계속된 권유, 과거 어머니 수술로 보험 혜택을 본 경험,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아내와의 혼인과 출산으로 보험의 필요성을 절감해 다수의 보험에 체결했다고 이씨는 주장했는데 형사소송에 증인으로 나온 보험설계자들도 같은 취지로 진술했다. “이씨 성격이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여 보험 가입을 권유하면 잘 거절하지 못했다.”(보험설계사 ㄱ씨) “처음에는 거절하다가도 다시 방문하면 가입해주기도 하고 이씨가 운영하는 생활용품점에서 보험영업에 필요한 기념품, 선물 등을 자주 사며 보험 가입을 권유하기도 했다.”(보험설계사 ㄴ씨) ⑤생활용품점 수입 등을 고려할 때 교통사고 당시 이씨는 보험료 부담을 감당할 만한 경제적 상황이었다. ⑥보험 계약은 대부분 해지하지 않았다. 이씨 본인이나 나머지 가족을 피보험자로 한 보험계약도 마찬가지다.
재판부는 고의로 교통사고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근거로 네 가지를 꼽았다. ①이씨와 아내는 교통사고 발생 시까지 원만한 부부생활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②고속도로에서 주행 중 차량의 조수석 쪽만 부딪히도록 정확히 맞춰서 추돌하기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속 60~70㎞로 정면 추돌을 할 경우 운전석에 탄 운전자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에도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이씨는 다리 등 신체 일부가 차량 구조물에 끼어 119구조대 도움으로 차량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③차량 앞쪽 직접 추돌 부위는 전면 유리 상단을 기준으로 우측 약 68%에 해당하는 데다 이씨가 다친 곳도 목 늑골, 대퇴부 등으로 경동맥이나 대퇴동맥 등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부위에 가깝다. ④아내의 사망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런 범행방법을 택한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행위다.
이씨는 교보생명 외 다른 보험사들을 상대로도 각각 소송을 냈지만 1심 판결들은 엇갈렸다. 삼성생명과 NH농협생명을 상대로 한 소송에선 이씨가 이겼지만 미래에셋생명과 라이나생명을 상대로 낸 소송에선 졌다. 승패를 가른 변수는 의외로 아내의 한국말 실력이었다. 미래에셋생명과 라이나생명 소송에서 1심은 이씨가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다고 보지 않았지만, “아내가 내용을 정확히 이해 못 한 채 계약했다”, “한국말이 서툴렀다”는 보험설계자 증언 등을 근거로 보험 계약을 무효라고 판단했다. 패소한 쪽은 모두 항소해 2심이 진행 중이다.
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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