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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는데도 지속해서 전화를 건다면 스토킹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대법원 첫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서 정당한 이유 없이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글·말을 도달하게 해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킨 혐의(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기소된 ㄱ씨에게 일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9일 밝혔다. 전화벨 소리, 피해자 휴대전화에 뜨는 ‘부재중 전화’ 문구 등도 스토킹처벌법이 정한 스토킹 행위에 해당한다는 취지다.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급심 판결은 유·무죄가 엇갈려왔다.
2021년 10월29일 연인 관계였던 ㄱ씨가 사업자금 천만원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ㄴ씨는 이를 거절하면서 ㄱ씨의 휴대전화 번호를 차단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ㄱ씨는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11월26일까지 ㄴ씨에게 수십 차례 카카오톡 및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29차례 전화를 걸었다.
수사기관은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ㄱ씨를 재판에 넘겼다. 스토킹처벌법은 상대방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방에게 전화, 정보통신망 등을 이용하여 글·말·음향 등을 도달하게 함으로써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키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1심은 유죄로 인정하고 ㄱ씨에게 징역 4개월과 스토킹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선고했다. 2심도 징역 4개월을 선고하기는 했으나 휴대전화를 건 행위는 무죄로 봤다. 전화를 받지 않았으므로 정보통신망을 통해 ㄴ씨에게 ‘음향’ 보냈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상대방 전화기에 울리는 벨소리는 정보통신망법상 처벌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2005년 대법원 판례가 근거가 됐다. 스토킹처벌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정보통신망법으로 스토킹 행위를 처벌했다. ㄴ씨의 휴대전화에 표시된 부재중 전화 문구가 전화기 자체 기능에서 나오는 표시라 ㄱ씨가 보낸 글이나 부호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도 무죄 근거가 됐다.
대법원은 원심의 무죄 판단을 뒤집었다. 반복적으로 전화가 걸려 오면 피해자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느끼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에도 그 감정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대법원은 “스토킹 행위가 반복돼 불안감 또는 공포심이 증폭된 피해자일수록 전화를 받지 않을 가능성이 큰데,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스토킹이 아니다’라고 판단하면 우연한 사정에 의해 처벌 여부가 좌우되고, 처벌 범위도 지나치게 축소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화를 받지 않아도 피해자) 휴대전화에 벨소리·진동음이 울리고, ‘부재중 전화’ 문구가 표시된다는 점을 알 수 있었으므로 가해자의 미필적 고의는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전화를 걸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행위’ 역시 스토킹 행위로 봤다. 2심은 ‘7초간 전화통화’에 대해 ㄱ씨가 걸었지만, 대화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며 무죄로 봤다. 대법원은 “피해자와 전화통화 당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통화 전 울린 벨소리, 표시된 발신자 전화번호 등을 통해 피해자에게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된다면 스토킹 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대법원은 스토킹 범죄의 특성상 피해자를 ‘신속’하고 ‘두텁게’ 보호해야 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스토킹 행위는 시간이 갈수록 정도가 심각해져 폭행·살인 등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라며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반복적으로 전화를 시도하는 행위로부터 피해자를 신속하고 두텁게 보호할 필요성이 크다”라고 밝혔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