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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경찰 입맛대로 ‘판례 해체’…문화제 강제해산 책임 법원에 떠넘겨

등록 2023-06-14 08:44수정 2023-06-14 11:36

경찰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인근 인도에서 열린 비정규직 노동단체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의 1박 2일 문화제 참가자들을 강제 해산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인근 인도에서 열린 비정규직 노동단체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의 1박 2일 문화제 참가자들을 강제 해산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이 야간문화제를 사실상 집회라 보고 잇따라 강제해산하거나 개최한 노동조합을 압수수색해 논란이 일고 있다. 집회와 문화제를 구분하는 법 규정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찰은 “판례에 따라 판단한다”고 밝혔지만, 판례 안에서도 경찰 입맛에 맞는 부분만 근거로 대고 있어 자의적 해석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13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청은 ‘야간문화제와 집회를 어떻게 구분하는가’라는 기자단 질의에 2005년 선고한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대법원은 2001년 6월14일 개최된 ‘주한미군 없는 평화세상을 여는 열린음악회’가 촛불을 들고 미군 규탄 발언 등을 했다는 이유로 순수 음악회가 아닌 집회로 보는게 타당했다고 판단했다며, 피켓·구호 등을 기준으로 집회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설명이다.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으로는 집회·시위와 문화제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별 판례를 강제 해산의 주요 근거로 들고나온 것이다. 우종수 국가수사본부장은 전날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집회에 대해서는 법에 추상적인 규정만 있어 판례에 따라 판단하고 있다”고 밝힌 뒤, 사안마다 다른 판결이 나온 만큼 법적 근거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최종 판단은 법원에서 한다”고 답했다.

이날 경찰은 2005년 판례 외에도 2004~2015년 판례들을 ‘기타 제공 판례’로 제시했다. 실제 경찰이 제시한 다른 판례들을 보면, 지난 9일 대법원 앞 노동단체의 야간문화제를 미신고 불법집회라며 강제해산을 강행했던 경찰 논리에 반하는 내용도 포함돼있다. 2012년 대법원은 2009년 1·2차 시국선언과 ‘교사·공무원 시국선언 탄압 규탄대회’를 추진한 데 대해 “미신고라는 사유만으로 그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해산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이는 사실상 집회의 사전신고제를 허가제처럼 운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므로 부당하다. 집회 해산은 타인의 법익이나 공공의 안녕질서에 대해 직접적인 위험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여 허용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주최 쪽에서 집회·시위가 금지된 장소로 확장하려고 하다가 인도를 점거한 데 대해서도 “공공의 안녕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이 명백하게 초래했는지”를 두고 대법관들의 입장이 엇갈렸다.

문제는 뚜렷한 법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 입맛에 맞는 개별 판례에만 의존해 법 집행을 하면서 집회 성격을 갖는 문화제까지 과도하게 제한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문화제는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현저히 적어 집시법 대상에서 제외됐음에도, 경찰은 이런 성격의 문화제까지 집회·시위를 규제하려는 목적으로 단속하면서 시민들의 집단 의견 표출은 과도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실제 대법원은 상황별로 판단하고 있지만, 문화제가 공공의 안전을 저해하지 않는 한 제약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판결하고 있다. 심지어 집회·시위의 시간을 제한한 법률은 2009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새로운 입법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경찰은 야간에는 무조건 금지통고하고 있어 집회 대신 야간문화제가 이어지고 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과거 관혼상제, 종교행사 같은 경우 마당이나 광장 같은 정해진 장소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신고대상에서 배제된 것”이라며 “시대가 바뀜에 따라 문화제와 집회·시위를 구분하는 기준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문화제라 하더라도 교통을 방해할 수 있고, 소음을 야기해 공공의 안녕을 해칠 수 있다. 법원도 경찰도 문화제와 집회를 구분할 수 있는 뚜렷한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경찰서장이 현장에 따라 집회냐, 문화제냐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떤 법적 근거가 없는 굉장히 위험한 권한 남용”이라고 했다.

헌법이 규정한 집회·시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려면, 문화제 또한 집시법 대상에 포함하고 어떤 유형의 집회라도 주최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공권력이 행사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선휴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현재 경찰이 집시법을 집회를 규제, 억제하는 쪽으로 운용하다 보니 집회와 문화제 모두 제한할 수 있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문화제 또한 헌법상 집회 자유가 보장되는 대상이 되는 집회로 어떤 유형의 집회라도 최대한 기본권이 보장되려면 집회의 개념을 넓게 잡고 경찰이 인권 친화적으로 집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장나래 기자 wing@hani.co.kr 박지영 기자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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