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5일 <한겨레>와 만나 삼청교육 항쟁과정의 진상규명과 특별법 개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적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회장. 고경태 기자
“광주는 폭도, 삼청은 깡패.”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8월부터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사람들을 잡아와 군부대에 보내기 시작했다. 광주는 폭도로 몰아붙였고 삼청에는 깡패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계엄사령부의 계엄포고 제13호에 따라 1980년 8월1일부터 12월29일까지 6만755명이 끌려가 이 중 3만9742명이 순화교육의 고통을 당했다. 43년이 지났으나 반격은 이제 시작되고 있다. 변화 움직임과 피해자들 목소리를 소개한다. 편집자
이적(본명 이만적, 66) 삼청교육대 전국피해자연합회 회장은 한국사회에 삼청교육 피해의 실상을 처음 알린 인물이다. 1988년 ‘정화작전 : 삼청교육대 수기’(전예원)를 냈고, 이후에도 자전적 장편소설 ‘한국판 수용소군도 삼청교육대’(2017, 시아출판사) 등 5권의 관련 도서를 냈다. 3년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고 마지막에 청송보호감호소에 있다가 1983년 4월 석방된 뒤 신학교에 들어갔다는 이적 회장은 현재 김포 애기봉 밑에 있는 민통선 평화교회의 대표목사이기도 하다.
안중근씨가 동료 감호생 우광천·남일홍·박영두의 죽음을 옆에서 겪었다면, 이적 회장은 임근실이 옆에서 고문당하다가 서서히 죽어나가는 과정을 목격했다. 이 회장은 삼청교육이라는 지옥에서 임근실처럼 저항하다 죽은 이들의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적 회장은 주말을 제외한 평일이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맞은편 공원부지에 있는 삼청교육대 전국피해자연합회 농성 천막으로 출퇴근한다. 현재 85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데 매일 2인1조로 선전전을 한다고 했다. 그는 삼청교육 피해자들이 몸사리지 말고 배상과 진상규명을 요구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떻게 끌려갔는가
“경남 삼천포(현 사천)에 살 때였다. 일제검거가 8월부터 시작됐는데, 나는 1980년 10월7일 삼천포경찰서에 끌려갔다. 처음에는 외상값 7000원을 걸고넘어지더니, 나중에는 문학동인지에 쓴 ‘어머니’라는 시를 문제삼았다.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아버지 사촌들 때문에 어머니와 누나, 고모 등이 경찰에 끌려가 들볶일 때였다. 그해 10월20일 원주38사단에 가 4주간 죽다 살아났다. 말이 교육이고 훈련이 하루종일 목봉체조에 피티체조였다. 그리고 나서 파주28사단으로 가서 근로봉사를 했다. 도로 뚫고 사격장 만들고 도로평탄작업하고 통신선 매설하는 노역에 동원됐다. 얼음이 있는 땅을 1m는 파야 맨흙이 나온다는 걸 그때 알았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맞은편 천막에 모여 특별법 개정을 요구하는 삼청교육 피해자들. 사진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제공
2022년 가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앞에서 진상규명과 배·보상을 정부에 촉구하는 삼청교육 피해자들. 사진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제공
―청송보호감호소에 1981년 11월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자마자 조경 노역에 동원됐다. 길 양편 3km에 이르는 가로수는 감호생들이 다 심었다. 내가 50그루는 심었을 거다.
―그 전에 파주28사단에서 동료 감호생 임근실과 함께 고초를 당했다.
“파주28사단에서 임근실이 너무 배가 고파 땅바닥의 밥알을 주워먹고 불침번을 거부했다고 특수교육대에 끌려가 괴롭힘을 당했다. 임근실 한 사람한테 조교 4명이 달라붙었다. 오리걸음 등으로 하루종일 뒹게 하고 매타작을 했다. 그때 내가 수양록이라는 일기장에다가 ‘임근실의 외침은 정의의 외침’이라는 내용으로 적었는데 그게 검열 과정에서 발각됐다. 그때가 1980년 12월14일이었다. 영하 15도는 되었다. 임근실과 함께 옷을 모두 벗고 땅바닥에 눕게 한 뒤 양동이로 찬물을 퍼부었다. 그 옆에 군견용 개집이 있었는데 임근실이 개집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조교들이 개집 문 있는 곳을 하늘 쪽으로 향하게 한 뒤 다시 찬물을 개집 안으로 퍼부었다. 그리고 나는 풀려나긴 했는데, 나를 조사하던 보안대 지대장(중사)이 ’영원히 세상 빛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한 말을 잊을 수 없다. 그러더니 보호감호 3년을 때렸다. 청송감호소로 갔고, 83년 4월29일 석방됐다.”
―임근실은 어떻게 죽었나.
“나와 함께 물고문당했던 그 다음날 죽었다. 물고문과 폭력으로 죽은 거다. 89년 5공청문회 속기록을 보면 조교들이 임근실의 사지를 한군데씩 들고 내무반으로 들어온뒤 엎드리게 하고 한 조교가 연탄 갈 때 쓰는 직경 1㎝ 가량의 철근으로 내리쳤고, 다시 뉘어놓은 뒤 그 철근으로 무릎과 낭심 사이를 힘껏 내리친 것으로 나온다. 가해자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국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중이다. 무엇을 요구하는가.
“진상규명과 특별법(삼청교육피해자법) 개정을 요구한다. 특히 진상규명은 한 번도 된 적이 없다.”
―어떤 진상규명이 필요한가.
“임근실처럼 저항하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진실규명이 필요하다. 2004년 삼청교육피해자법이 제정된 뒤 국무총리실 산하에 삼청보상위가 설립됐는데 여기서 집계한 교육 중 사망자가 44명이다. 이들은 왜 죽었는가. 또한 안중근씨가 있었던 27사단은 물론 5사단, 11사단, 15사단에서 감호생들의 집단 저항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총기 발포 사건도 발생했다. 왜 집단 저항이 발생했는지, 총은 누가 쏘고 상부 책임자는 누구인지 등 가해자들의 실체적인 명단을 작성해야 한다. 1988년 5공 청문회 때 일부 밝혀졌지만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은 적은 없다.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1984년 청송교도소에서 죽은 박영두와 1981년 5사단 기간병 발포로 죽은 전정배는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했지만, 이들 말고도 많다. 이게 난동이 아니라 항쟁이었음도 명확히 해야 한다.”
―지금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을 하고 있지 않나. 현재 758건이 신청됐고 310명이 진실규명됐다.
“현재 800여명 신청했지만 턱없이 적은 숫자다. 2기 진실화해위에서 2년간 신청 받았는데, (신청 가능하다는 사실을)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현재 삼청교육 전담 조사관이 4명인 걸로 아는데 국 전체가 조사를 해도 모자란다.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아마 1만여명 정도 될텐데 삼청교육은 그 네 배다. (피해자들 신청이 필요없는) 직권조사가 필요하다.”
이적 회장은 1988년 국회 5공 청문회에 출석해 삼청교육의 실상을 폭로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현재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이 삼청교육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2004년 만들어진 삼청교육피해자법은 삼청교육으로 인하여 사망·행방불명되거나 후유증으로 사망한 자, 상이를 입은 자만 피해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번에 발의된 개정안은 ‘삼청교육과 관련하여 연행·구금·가혹행위 등으로 인권침해 받은 사람’으로 피해 범위를 확대했다는 측면에서 진일보했지만 진상규명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 개정법률안 시행령에 꼭 직권조사와 배·보상 조항을 넣어야 한다. 그래야 진실화해위가 해체된 뒤에도 추가 조사와 배·보상을 할 수 있다. 현재의 개정안엔 크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 법률안이 국방위를 통과해야 하는데 국방위 위원들 중 장성급 출신들이 많지 않나. 군 비리 안 들춰내려고 한다. 회기가 바뀌면 국방위에서 행정안전위로 바꿔 신청하려고 한다.”
―삼청교육대 피해자들로부터 연락이 많이 오나.
“매일 5통 가량 전화가 온다. 아직도 삼청교육 피해자 운동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재심 청구할 돈 없다고 지레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1980년 폭압정치의 한을 잊지마라. 지금이라도 제대로된 진상규명과 배보상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불운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함께 헤쳐나가야 한다 연합회로 연락(010-5007-6229)달라.”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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