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삼청교육 최후의 항거자, 안중근의 재심

등록 2023-07-31 06:00수정 2023-07-31 08:45

[삼청교육, 그 후 43년 ②]
순화교육-근로봉사-보호감호 8년만에 출소해 지옥같은 삶
20년 전 죽은 동료 위해 증언, 이제 내 명예회복 위해 최선
삼청교육 피해생존자 안중근씨가 지난 7월27일 오후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한 카페에서 증언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삼청교육 피해생존자 안중근씨가 지난 7월27일 오후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한 카페에서 증언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광주는 폭도, 삼청은 깡패.”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는 8월부터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사람들을 잡아와 군부대에 보내기 시작했다. 광주는 폭도로 몰아붙였고 삼청에는 깡패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계엄사령부의 계엄포고 제13호에 따라 1980년 8월1일부터 12월29일까지 6만755명이 끌려가 이 중 3만9742명이 순화교육의 고통을 당했다. 43년이 지났으나 반격은 이제 시작되고 있다. 변화 움직임과 피해자들 목소리를 소개한다. 편집자

“짐승 같은 시간을 견디고 드디어 재심을 신청합니다.”

삼청교육대 피해생존자 안중근(67)씨는 지난 27일 한겨레와 만나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1988년 12월23일 청송교도소에서 가석방된 안씨는, 4만명 가까운 삼청교육대 피해자 중 가장 마지막에 세상으로 나온 일곱 명 중 하나다. 1981년 10월 화천 27사단 77연대 4대대의 감호생(보호감호생)들이 집단 저항하다가 2명이 기간병의 발포로 사살당하는 현장에 있었고, 1984년 10월 청송교도소에서는 동료 감호생 박영두씨와 지하실 독방에 나란히 갇혀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다가 옆방에서 박씨가 사망하는 일을 겪었다. 그런 그가 지난 5월부터 변호사들 조력을 얻어 재심을 시작했다. 12억8000여만원의 배상금을 청구하는 국가배상소송도 함께 진행 중이다.

안씨가 청송교도소에서 고 박영두씨와 함께 저항했던 이유도 “재심 청원을 위해 집필할 권리를 달라”였다. 처음에 말로 요청하자 교도관들은 무시했고, 단식을 하자 팔을 뒤로 묶어놓고 강제급식을 시켰다. 결국 유리조각을 몰래 구해 배를 긋고 그 피를 플라스틱 배식판에 담아 뿌리며 절규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폐쇄독방 이감과 더 가혹한 대우였다. 이후 민간인 접촉을 위해 탈주를 모의하는 과정에서 발각돼 박영두씨가 죽었다.

안씨는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고 고 박영두씨 죽음의 진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핵심 증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박씨는 죽어서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삶이 지옥이라 죽은 박영두씨가 부러웠다는 안씨는 “20년 전에는 영두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제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삼청교육대 최후의 저항자 안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 너무 배고파 쓰레기통 뒤지고 뱀 잡아먹어

—처음에 어떻게 끌려갔나.

“경북 영주에서 식당 운영하는 큰 형님 일을 도와주면서 살고 있었다. 스물네 살이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폭력 사건으로 전과가 두 개 있었다. 1980년 7월31일, 아는 형사가 ‘잠깐 왔다 가라’고 했다. 그래서 영주경찰서에 갔더니 ‘훈련만 받고 나오면 전과를 싹 없애준다’고 말했다. 그 말에 혹했다. 속았다.”

—안동의 제36사단에서 여러 곳을 거쳐 화천의 제27사단으로 갔다던데.

“36사단에서 4주간 훈련 끝나고 3개월 근로봉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대관령 7908부대로 가 강제 노역을 했다. 대관령에 대형텐트가 50~60개 있었다. 한 막사에 20~25명 생활했는데 너무 배가 고파 비참하게 생활했다. 순화교육 받을 때는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걸 찾았는데 대관령에선 뱀이나 땅강아지, 굼벵이를 보는 대로 잡아먹었다. 기상 이변으로 원주 603 포부대로 이동해 또 1군사령부 보안대 공사 강제노역을 했고, 3개월이 끝났는데도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 홍천11사단에서 군인 휴양소 짓는 일을 했다. 자연석을 세운다고 해서 한겨울에 개울의 얼음 깨고 큰 돌을 주워 나르는 작업을 했다. 홍천11사단에서 근로봉사 기간이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됐다는 이야기를 정보참모라는 중령한테 들었다. 81년 1월 중순경에는 행정반에 불려가 ‘보호감호 2년’이라는 서류를 받았다. 그리고 27사단 77연대 4대대로 갔다.”

✏️ 우광천·남일홍·장시재 죽던 날

—청송보호감호소가 완공되지 않아 27사단 77연대 4대대에서 보호감호 생활을 한 것으로 안다.

“그날이 1981년 10월1일이었다. 국군의 날이라 기간병들이 체육대회를 했다. 감호생들이 160명가량 되었는데 이들 사이에서 자체 인사계 역할을 하는 50대의 명두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 오후 5시경 내무반에서 기간병 하나가 명두환씨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는 일이 있었다. 감호생들 대부분 ‘우리를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할 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무차별 폭행하는 걸 보고 다들 흥분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는 다른 감호생 세 명과 함께 대대장을 면담하러 100m 거리의 대대장실에 갔다. 거기서 ‘구타하지 말아달라, 배불리 먹게 해달라’ 등의 요구를 하며 한 시간 정도 면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탕탕하는 총성이 들렸다.”

—그날 감호생 두 명과 중사 한 명이 죽었다.

“그렇다. 총성을 듣고 급히 내려가니 취사장 앞에 감호생 우광천이 피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시계가 없었지만 짐작으로 7시경이었다. 내무반에 들어가 보니 술과 빵이 널려 있었다. 그날 내무반에서는 장시재 중사가 죽었다. 장시재는 정이 많고 감호생들에게 잘해주었던 사람이다. 감호생 명두환이 기간병한테 두드려 맞은 뒤 감호생들이 흥분해 있으니까 말리려고 들어왔다가 맞아 죽은 것 같다. 그 전이었는지 후였는지 감호생들이 내무반에서 20m 거리에 있는 피엑스(군 매점)를 털고 술과 빵을 가져왔다. 우리가 대대장 면담할 때 그런 것 같다. 장시재가 죽고 우광천도 죽고, 내무반에서는 고성이 오가고 있는데, 기간병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쥐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 무장한 상태로 내무반 외곽에서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두려워했다. 우리는 침상과 창틀을 뜯어서 불을 피우고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하면서 밤을 새웠다. 그때 사단장도 부대에 왔던 것으로 안다. 10시경 감호생 남일홍이 철조망 위에 매트리스를 올려놓고 밖으로 넘어가려다 총에 맞았다. 총성을 들었다. 남일홍은 즉사한 것으로 안다.”

2022년 가을 삼청교육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앞에서 피해자들이 시위를 벌이는 자리에 참여해 발언하는 안중근씨(맨 왼쪽). 사진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제공
2022년 가을 삼청교육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앞에서 피해자들이 시위를 벌이는 자리에 참여해 발언하는 안중근씨(맨 왼쪽). 사진 삼청교육대전국피해자연합회 제공

✏️ 무기징역 때린 군 검사가 뛰어와…

—다음날 아침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무장군인들과 대치하다 체포돼 원주의 1군 사령부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거기서 3~4일 잠도 못 자고 두드려 맞으면서 조사를 받았다. 10월5일인가 6일에 춘천 2군단 헌병대로 가서 재판을 받았다. 변호사도 없고, 그게 재판인가. 나중에 들으니 변호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해 웃었다. 군 검찰이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15일만에 1심 재판 선고를 받았다. 15년형이었다. 군용물 손괴, 특수절도, 사회보호법 위반죄 등으로 기소됐다. 군용물 손괴는 침상과 창틀을 부숴 불을 붙였다는 거고, 특수절도는 피엑스에서 술을 탈취하였다는 것이다. 감호생들끼리 항소 포기하자고 했다. 근데 검사가 뛰어왔다. 자기는 중위밖에 되지 않아 위에서 최고형을 주라고 해 따를 수밖에 없었다면서 제발 항소를 하라고 했다. 안 한다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들이라도 항소하겠다고 했다.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항소 기각당하고, 나중에 나는 10년형 받은 거로 안다. 남한산성(육군교도소), 안양교도소, 안동교도소 거쳐 83년 3월에 청송교도소로 갔다. (원래는 청송보호감호소였으나 이때부터 청송교도소로 명칭이 바뀜) 27사단 있던 감호생 중 청송교도소 간 사람이 18명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

✏️ 유리조각으로 자해하며 “재심하게 해달라”

—박영두가 죽던 순간에 관해 이야기해달라.

“내가 1983년 9월 청송교도소 9사에서 재심 청원을 위한 집필권 요구를 하며 유리조각으로 자해를 한 뒤 이감된 곳이 7사 폐쇄독방이었다. 내가 끌려가니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감호생 제기석 박영두가 문을 차며 난동을 부렸다. 그러자 그들도 7사 폐쇄병동으로 왔다. 그리고 또 조금 있다 ‘대도’로 유명한 조세형과 서울남부지원 재판정에서 탈주했던 이상훈이라는 조폭이 들어왔다. 이렇게 다섯 명만 있었다. 1984년 10월 중순에 여기서 감호생끼리 민간인과 접촉할 수 있는 곳까지 탈주할 계획을 세웠는데, 사전에 낌새를 눈치챘는지 나랑 박영두가 끌려가 청송교도소 8사 지하실에 갇혔다. 그곳은 상상하기 힘든 곳이다. 인간임을 포기해야 하는 곳이다. 나와 박영두한테 각각 교도관 4명씩 붙어 밟고 두들겨팼다. 차라리 죽이라고 욕하면서 소리치니까, 교도관들이 4인1조로 교대하면서 팼다. 나중엔 무감각했다. 기절을 서너 번 했다. 그러면 물 끼얹고 또 때리고 비녀꽂기, 날개꺾기 등의 고문을 했다. 입에 마스크와 방성구 덮어씌우고 손 뒤로 묶고 한 다섯 시간 동안 때렸다. 밤 7시부터 밤새 맞고 실신해 있다가 새벽에 깜빡 깼는데 옆방에서 나지막이 ‘가슴이야, 가슴이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느낌이 이상했는데, 새벽 5시쯤 우당탕 군홧발 소리가 나더니 방 따는 소리가 나더라. 그러더니 나도 의무과 데려가 영양제 놔주고 해서 이상하다 싶었다. 그날 박영두가 죽었다. 이아무개 주임이란 자가 ‘박영두는 심장마비로 죽었다. 가족이 동의해 청송교도소 뒷산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당신들이 죽였다’고 했더니 ‘너도 죽고 싶냐’고 협박했다.”

—박영두는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 신장시킨 활동’으로서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한 사실이 인정되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다. 2003년 박영두의 형이 찾아와 증인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사회 나가면 박영두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겠다고 다짐해온 터에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의문사위 조사관들과 함께 청송교도소(현 경북 북부교도소)에 가서 현장 재연도 했다. 당시 교도관들 조사하러 갈 때도 함께 가 교도관들이 틀린 이야기 하면 바로잡아주었다. 사실 박영두는 죽어서 보상을 받았지만, 살아있는 나는 제대로 된 보상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죽은 박영두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죽은 영두가 부러웠다, 내 삶은 지옥이라…”

—88년 12월23일 가석방됐다.

“그때 5공 청문회에서 삼청교육대 문제가 거론될 때다. 당시 야당인 평민당 국회의원들이 청송교도소에 내려오고 그랬다. 그래서 법무부가 할 수 없이 내보냈을 거다.”

삼청교육 피해생존자 안중근씨가 지난 7월27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한 카페에서 증언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삼청교육 피해생존자 안중근씨가 지난 7월27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한 카페에서 증언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그 뒤 어떻게 살았나.

“앞에서 말했지만, 죽은 박영두가 부러웠다. 내 삶은 사람답게 사는 게 아니라서 그랬을 거다. 트라우마로 제 정신 가지고 살 수 없었다. 술을 마셨고, 술만 마시면 분노조절을 못 해 사고를 쳤다. 그래서 또 몇 번 감방에 갔다. 술만 마시면 ‘영두가 부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북 영양의 산에 들어가 하우스치고 닭 키우며 살다가 차에서 자살 시도한 적 있다. 그때 후유증으로 폐에 물이 차서 한동안 제대로 숨을 못 쉬었다. 정신과 약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지금도 지옥에 산다. 43년 전, 1980년에서 내 인생은 멈췄다. 그래도 고마운 분들을 만났다. 내가 면목동에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사는데 2022년 중랑구청 복지과의 한 부장님이 진실화해위(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를 구청에 데리고 가 진실규명 신청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올해 2월에 진실규명 통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삼청교육대 전국피해자연합회 사람들도 만나고 변호사들과 선이 닿았다. 그래서 재심 청구까지 하게 된 거다.”

✏️ 재심 통해 잃어버린 인생 되찾고 싶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아직도 너무 억울하다. 재판다운 재판을 받은 게 없고, 내 청춘이 비참하게 다 날아갔다. 홍천 11사단 있을 때는 아버지 부고를 받았지만 밖에 내보내 주지도 않았고, 27사단에서는 기간병한테 소총 개머리판으로 입을 맞아 무더기로 치아가 빠져 군 재판 받을 때는 치아가 서너개 밖에 없었다. 지금은 모두 틀니다. 이마와 가슴에도 흉터가 있다. 그래도 27사단 77연대 4대대 기간병과 감호생이 죽어나가는 현장에서 끝까지 동료 감호생들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거기에 관해 증언을 서주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재심을 통해 명예 회복하고 싶다. 잃어버렸던 인생을 되찾고 싶다. 20년 전에는 동료 감호생 영두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제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단독] 쇠파이프 들고 “판사 어딨어!”...서부지법 공포의 3시간 1.

[단독] 쇠파이프 들고 “판사 어딨어!”...서부지법 공포의 3시간

[속보] 지지자 난동 터지자…윤석열 “평화적으로 표현해야” 2.

[속보] 지지자 난동 터지자…윤석열 “평화적으로 표현해야”

윤석열, 비상입법기구 쪽지 “내가 썼는지 가물가물” 3.

윤석열, 비상입법기구 쪽지 “내가 썼는지 가물가물”

노동자 집회엔 “엄정 대응”, 지지자 난동엔 “관용적 자세를” 4.

노동자 집회엔 “엄정 대응”, 지지자 난동엔 “관용적 자세를”

‘윤석열 지지 난동’ 부추긴 전광훈·석동현, 교사범 수사 받나 5.

‘윤석열 지지 난동’ 부추긴 전광훈·석동현, 교사범 수사 받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