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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우리는 10살에 악마의 소굴로 납치됐다”

등록 2023-08-23 08:00수정 2023-08-23 10:48

18일 진실화해위 영화숙·재생원 직권조사 의결, 피해생존자 배영식·김귀철씨의 인생
초등학교 시절 영화숙에 납치돼 가혹한 인생역정을 겪었던 배영식, 김귀철씨(왼쪽부터). 배씨는 창원 마산에, 김씨는 부산에 산다.  본인 제공
초등학교 시절 영화숙에 납치돼 가혹한 인생역정을 겪었던 배영식, 김귀철씨(왼쪽부터). 배씨는 창원 마산에, 김씨는 부산에 산다. 본인 제공
“무더운 여름날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시나요. 오늘 진화위에서 저희 영화숙·재생원 직권조사 결정이 나서 이렇게 알려드립니다. 모두 고생하셨고,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면 협조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진실은 언젠가 승리하는 법.”

“그동안 노력하신 분들께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 조사를 통해서 아픈 마음들이 치유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뭉쳐야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잘 뭉쳐봅시다.”

지난 18일 오후 5시께 손석주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영화숙·재생원 직권조사안이 의결됐다는 소식을 피해생존자들이 모인 그룹채팅방에 전했다. 떠들썩하고 열띤 환호는 없었다. 모두 60대가 넘은 30여명의 채팅방 참가자들은 “수고했다. 축하한다, 응원한다”는 인사를 진지하고 나지막한 어조로 나눴다.

직권조사 꿈같은 일

23일 아침 진실화해위는 지난 18일 60차 전체위에서 의결된 부산 영화숙·재생원 직권조사 결정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앞으로 영화숙·재생원 진실규명 신청인에 국한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피해자들을 만나 실태를 조사할 예정이다.

영화숙·재생원 주요 임직원, 관련 공무원도 만나 단속 및 수용과정의 적법성 여부, 의식주 관련 보조금 집행의 문제점 여부, 교육받을 권리의 침해 여부, 구타 및 가혹행위 등 불법행위 여부, 정부와 부산시 및 사하구청 등 관리·감독관청의 인권침해 묵인·방조·은폐 여부등을 들여다본다.

1970~1980년대 인권유린으로 악명을 떨친 부산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1930~2016)이 모델로 삼은 수용시설이 바로 1950~1970년대 이순영 원장(1981년 사망)의 영화숙·재생원이다. 형제복지원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만 아직도 영화숙·재생원은 낯설다.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직권조사 발표를 계기로 19일과 20일 한겨레 전화 인터뷰에 응한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배영식(69)·김귀철(69)씨는 “직권조사한다고 만신창이가 된 인생을 되찾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꿈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번 직권조사를 통해 영화숙·재생원의 존재가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면서 “더 많은 피해생존자들이 직권조사 소식을 듣고 우리들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가장 최근인 올해 4월과 6월 피해자들 모임에 합류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꼬마야 뭐하니?” “아빠 기다려요”

배영식 김귀철씨는 1954년생 동갑이다. 배씨는 아버지가 이북 출신, 김씨는 아버지·어머니 모두 이북 출신이다. 전쟁 전후로 피난 내려와 정착하기 위해 아등바등 사느라 자식에게 신경을 못 쓴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황당하게 납치되었다.

배씨는 부산 초량동의 중앙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생이던 1965년(추정) 오전반 학업을 파하고 책보를 멘 채 광복동 용두산 공원에 놀러갔다가 갑자기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에 의해 덜렁 안아올려져 트럭에 태워졌다. 아버지는 1년 전 돌아가셨고 엄마는 여동생을 데리고 일하러 나가 집에 없었다. 늘 용두산 공원에 들러 놀다가 하교하곤 했었다. 트럭 안에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저멀리 자갈치 시장에서 부웅 뱃고동 소리가 울리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김씨는 부산 괴정국민학교 6학년이던 1966년(추정) 괴정동 신촌극장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가 빨간 모자를 쓴 아저씨 두 명과 마주쳤다. “꼬마야 뭐하니?” “아빠 기다려요.” 그들은 더 묻지 않고 양팔을 잡더니 트럭에 던져버렸다. 친모는 세상을 떠났고, 계모는 툭하면 때렸다. 소팔러 다른 지역으로 떠돌아다니던 아버지가 있을 때만 집에 가던 시절이었다.

10여년 동안 11개 시설에 잡혀들어가 학대를 받았던 시설수용 피해생존자 홍성정씨가 지난 3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열린 직권조사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자신의 피해사례를 이야기하다가 말을 잇지 못한 채 주저앉아 괴로워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10여년 동안 11개 시설에 잡혀들어가 학대를 받았던 시설수용 피해생존자 홍성정씨가 지난 3월 14일 오후 서울 중구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열린 직권조사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해 자신의 피해사례를 이야기하다가 말을 잇지 못한 채 주저앉아 괴로워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씨는 트럭에서 내린 뒤 철망이 있는 어떤 곳에 감금됐고, 조금 뒤 다시 트럭을 탔다. 미군이 쓰던 ‘쓰리쿼터’ 트럭엔 또래 아이들이 10여명 있었다. 밤길을 한참 달려 어딘가에 도착했다. 이곳이 부산시 서구(현 사하구) 장림동에 있는 영화숙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배씨도 똑같은 경로를 거쳤다. 배씨는 영화숙에서 인적사항을 기재하라고 해 자신의 집 주소를 또박또박 적고 엄마에게 편지도 써보냈으나, 그 편지가 엄마에게 갔는지, 엄마가 편지를 받고도 안 왔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이순영이 운영한 재단법인 영화숙은 각각 1951년과 1962년부터 문을 열었고 1000여명 넘는 원생을 수용했다. 영화숙은 400여명의 아동을, 재생원은 800여명의 아동과 성인을 함께 수용한 시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곳을 탈출할 때까지 영화숙에만 있었다.

목침 십자가에 못박힌 것처럼 엎드려…

구타를 견딜 수 없었다. 김귀철씨는 “안 맞고 넘어가는 날은 횡재였고, 조금 맞으면 운 좋은 날이었다”고 말했다. 아무 이유 없이 맞았다. 1~6소대와 보충대 등 군대처럼 총 7개 소대로 구성된 영화숙의 원생들에겐 계급이 있었다. 일반 원생 위에 조장, 그 위에 반장, 소대장, 지도장 등으로 올라갔다. 계급은 깡패였다. 내무사열 하다 맞고, 청소하다가 맞았다. 그렇게 맞고도 안 죽는 게 신기했다. 작은 회초리도 감당하기 힘든 10살 안팎의 아이들에게 손과 몽둥이 등 각종 도구로 매일 때렸다.

배고픔도 견딜 수 없었다. 두드려 맞고도 다행히 안 죽으면 배를 채워야 했는데, 산 목숨은 늘 허기졌다. 김씨는 “영화숙 밑에 있는 돼지 축사에 내려가 시레기 같은 음식물찌꺼기와 과일 껍질을 몰래 먹었다”고 했다. 걸리면 또 맞았다. 배영식씨는 “아침에는 꽁보리밥에 시래깃국, 점심은 미국에서 원조받은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 저녁은 강냉이죽이었다”고 말했다. 가끔 원생들끼리 수제비 건더기를 따먹기 해, 내기에서 지면 국물로만 배를 채웠다고 했다.

노역도 견딜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산을 깎아 운동장 만드는 일을 했다. 1000명이 넘게 들어갈 그 넓은 운동장을 어린이들이 만들었다. 그 운동장에서 제식훈련을 하고 포복훈련도 했다. 이순영 원장은 단상에서 아이들에게 사열을 받았다. 열을 맞춰 이순영 앞을 행군하며 “원장님께 경례” 구령이 나오면 모두들 고개를 돌려 목청이 터져라 “충~성”하고 외쳤다.

배씨는 1년 정도 있다가 탈출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주변의 지형지물을 익히지 못해 밤새 한참을 먼 곳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영화숙이었다. 곡괭이 자루로 엉덩이를 맞고 생똥을 싸며 기절했다. 얼마 뒤 두번째 탈출도 실패했을 때는 야전침대의 목침으로 만든 십자가에 예수가 못박힌 것처럼 엎드려 발바닥을 맞다가 졸도했다. 발바닥이 퉁퉁 붓더니 곪았고 나중에는 고름이 흘러나왔다. 아침에 주는 꽁보리밥조차 먹으러 걸어갈 수 없었다.

김씨는 1년2개월 있다가 첫 탈출에 성공했으나 3개월만에 다시 잡혀 들어왔다. 두번째 탈출할 때는 겨울에 언 낙동강을 건너다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빠져죽을 뻔했다. 두번째 탈출하고 난 뒤 또 잡혀들어왔다. 68년 세 번째 탈출을 했다. 화장실이 철창 밖에 있었다. 밤에 오줌 눌 때 꼭 무리 지어 가게 했다. 두 명의 원생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화장실을 가는 척하다 산을 타넘어 도망쳤다.

영화숙 세 번 탈출, 형제복지원에서 또 탈출

배씨는 어린 시절 두 번의 탈출에 실패한 뒤 한동안 포기했다가 19살 소대장이 되어 탈출에 성공했다. 1973년쯤이었다. 소대장은 감시받기보다 다른 이를 감시하는 자리였다. 배씨는 성인이 되어 조금 있으면 재생원으로 갈 참이었다. 영화숙이 있는 장림동에서 다대포로 연결된 비포장 도로 위로 매일 버스 지나다니는 모습을 봐두었다. 팔이 하나 없는 총지도장이 잠들어 있었다.

새벽에 기상하기 전 버스 오는 시간에 맞춰 1㎞를 걸어 밖으로 나갔다. 버스를 탔다. 과일 소쿠리를 든 아주머니들이 물었다. “도망 나왔지?” 주민들이 도망나온 원생들을 신고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신고한 주민들에게 이순영 원장이 밀가루 포대로 사례한다더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두려움에 얼어붙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배씨를 보호해주었다.

김씨는 세 번의 탈출 끝에 기어코 영화숙을 나온 뒤 넝마주이로 살았다. 어느날 자갈치 시장에서 자다가 누군가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 기절했다 깨어났더니 철창 안이었다. 이번에는 형제복지원이었다. 1975년이었다. 부산 주례동의 형제복지원은 영화숙을 베낀 지옥이었다. 조금만 반항하면 집단으로 때렸는데, 김씨에겐 그 강도가 영화숙보다 심한 듯 느껴졌다. 한 번은 여덟 명한테 집단폭행을 당했는데 누구한테 어디를 맞는지 알 수 없었다. ‘빠따’(몽둥이) 60대를 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왼쪽 다리에 마비가 왔다. 4~5개월 있다가 거기서도 탈출했다. 높은 지역에서 연병장 만드는 공사를 했다. 가마니에 흙을 담아 나르는 일이었는데, 어느날 철조망 밑으로 산비탈을 굴러내려와 도망쳤다.

배씨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10살에 납치되고 19살에 돌아왔으니 9년 만이었다. 1973년쯤의 일이다. 부산 동구 수정4동 845번지. 그러나 동네가 통으로 사라져 있었다. 높이 솟은 ‘수정아파트’라는 이름을 올려다보며 현기증을 느꼈다. 엄마도, 7살 터울 여동생도 없었다. 살아는 있는지, 지금도 모른다. 탈출은 성공했으나 가진 건 몸뚱아리 하나뿐. 그때부터 또 고생길이 열렸다. 전국을 떠돌며 다니다가 절도를 하게 됐고 구속됐다. 공주교도소에서 3년을 살았다. 아버지가 이북 출신이었으니 면회 올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24살에 다시 사회에 나왔다.

지난 3월14일 오후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등 단체 관계자들과 시설 수용 피해생존자들이 서울 중구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영화숙·재생원 등 수용감금 복지시설에 대한 진실화해위의 직권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바라던 직권조사는 다섯달 만인 8월에 이뤄졌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지난 3월14일 오후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청산위원회,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등 단체 관계자들과 시설 수용 피해생존자들이 서울 중구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영화숙·재생원 등 수용감금 복지시설에 대한 진실화해위의 직권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결국 이들이 바라던 직권조사는 다섯달 만인 8월에 이뤄졌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사막에 나무 한 그루 심는 심정

영화숙을 나와 넝마주이를 했던 김씨는 형제복지원을 탈출한 뒤에는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오만 잡일’을 다했다. 김씨 역시 징역을 살았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다. 배씨보다 훨씬 오랜 기간 교도소에서 지냈다고 했다. 김씨는 자꾸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고 했다. “좋은 추억이 없다”고 말했다. “아픈 추억뿐”이라고 했다.

배씨는 납치되기 직전의 초등학교 4학년이 배움의 전부였다. 교도소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주었다. 천자문을 뗐더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글자 안에 다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상식도 익혔다. 교도소에서 나와 다방에 재료 배달을 해주는 일을 했다. 다방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죽자사자 일했다. 아들과 딸이 어릴 때 부인이 집을 나갔다. 그래도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30년간 택시를 몰았다. 사막에 나무 한 그루 심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자꾸 자조를 하게 된다. 역시 ‘사막에 심은 나무는 뿌리가 약해 작은 바람에도 쓰러지는 것인가’ 하고.

김씨는 올해 6월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에 가입했다. 영화숙에 있었던 친구가 소개해주었다. 직권조사에 무슨 기대를 거느냐고 물었다. 그는 “병원에 가는 게 힘들다”면서 “내가 사는 동네에서 치료 좀 받게 해달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의아하여 알아보니 형제복지원 피해자로서 부산시로부터 의료지원을 받고 있었다. 올해 4월부터 공포·시행된 '부산시 형제복지원 사건 등 피해자 명예 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른 것이다. 처음 받는 혜택이라고 했다.

영화숙·재생원 피해자들도 피해자 인정을 받게 되면 김씨와 같은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김씨는 교도소에서부터 앓은 풍치로 지금 치아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실제로 전화 인터뷰를 하는 내내 김씨의 말은 자꾸만 새어나가 알아듣기 힘들었다. 부산시가 정해준 부산의료원 치과에서 곧 치아 본을 뜬다고 했다. 지하철 무임승차 혜택을 받지만 다리가 아파 이동하는 것조차 힘들다고 했다. 그는 “동네 근처에서 치료받게 해달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체념했는데 피해자 모임이 있었다

배씨는 올해 4월에 피해생존자협의회에 가입했다. 1년 전 티브이(TV)를 새로 사고 티브이에 유튜브를 연결했다. 이 유튜브에서 한국방송의 ‘시사직격’에서 다룬 영화숙·재생원 관련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형제복지원은 이슈화가 됐는데 왜 영화숙은 안될까 평소 생각해오던 터였다. 잊어버리려 했고 혼자 뛰어봤자 뭐 하나 하는 체념으로 살아왔는데, 뜻밖에도 피해자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협의회에 연락했다. 직권조사를 계기로 “정부와 부산시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홍보하고 피해자들을 찾아달라”는 말도 했다. 대부분 고령이고 배운 게 없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다고 했다. “부모가 맡긴 것도 아니고 학교 갔다 오다가 납치돼 인생이 뒤바뀐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달라”고 했다.

두 사람은 연도나 시기 등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가령 배씨는 아침에 탈출하던 날이 몇년 몇월이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봄여름가을겨울 여부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현실이 아니라 악몽을 꾼듯 했던, 인생을 뒤집어버린 가혹한 경험 앞에서 연도나 시기 등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오늘 한 이야기는 겪은 일의 10분의1도 안돼”

영화숙과 재생원은 부산시의 업무 위탁과 지원을 받은 합법 시설이었다. 그곳에서 아동들에 대한 납치와 구타·강제노역 등 불법행위가 난무했다. 국가가 묵인해 준 악마의 소굴이었다. 이 시설에서 수천여명이 배영식, 김귀철씨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버러지만도 못한 생활을 했다. 누군가는 탈출했고, 누군가는 탈출에 실패해 죽도록 맞았으며, 누군가는 정말로 죽어 뒷산에 묻혔다. 시설 밖으로 나가서는 적응하지 못해 방황했고, 그러다가 다른 시설로 가거나 사고를 쳐 교도소에 가면서 세상의 가장 낮은 바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간신히 사회에 적응해 자리를 잡았다면 극히 운이 좋은 경우였다.

배씨가 더듬더듬 말했다. “세상에 알린들 무슨 또 관심이 있겠냐마는…사람들이 자기 어려울 때를 생각해서 지금 어려운 사람들한테라도 관심 가져주고…내 일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고...그렇게 두루두루 해야…나도 선과 악이 동시에 있지만 선한 마음이 작동하도록 해야죠…한 두명 인생을 바꿔놓은 것도 아니고...그냥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얻고 싶어요. 오늘 한 이야기는 정말 겪은 일의 10분의 1도 안 됩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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