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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진실화해위가 부역 조사하는 기관입니까?” [현장에서]

등록 2023-08-30 08:00수정 2023-08-30 16:28

부역 등급 표시한 태안 사건 보고서 주석의 눈물겨운 최종 문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충남 태안 이원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진실규명 보고서에 부역혐의 등급을 표시하기로 의결했던 8월18일 제60차 전체위원회 모습. 29일 열린 제61차 전체위원회에서는 해당 진실규명 보고서에 부역혐의 등급과 관련한 주석을 어떻게 넣을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충남 태안 이원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진실규명 보고서에 부역혐의 등급을 표시하기로 의결했던 8월18일 제60차 전체위원회 모습. 29일 열린 제61차 전체위원회에서는 해당 진실규명 보고서에 부역혐의 등급과 관련한 주석을 어떻게 넣을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원기록심사보고서에 분류된 진실규명대상자의 부역사실을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다.” (조사4과 작성문안)

“희생 이유 등이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차이가 나고 사건 경과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작성이 되었다는 점에서 자료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희생 사실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이상희 위원 수정문안)

이 두가지 문안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29일 오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제61차 전체위원회에서는 진실규명 보고서의 주석 문안 확정을 둘러싸고 여야 추천 위원들끼리 날카로운 논쟁을 벌였다. 지난 18일 제60차 전체위에서 의결한 ‘충남 태안 이원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진실규명 보고서에 들어가는 주석 문안이었다.

이 보고서는 1980년 태안을 관할했던 서산경찰서가 작성한 ’신원기록심사보고’의 심사기준표를 인용해 ‘악질 부역’등 부역 혐의에 관한 등급을 처음 표시해 논란이 되었다. 당시 야당 추천 위원들은 부역 등급 자체를 넣지 말자고 했고, 토론 끝에 “사실 관계 입증에 한계가 있다”는 단서를 주석에 넣기로 구두 합의하며 의결한 바 있다.

그런데 다시 주석 문안이 문제였다. 22일 열린 1소위 회의에서 “부역사실을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담당 조사4과 작성 문안에 대해 야당 추천 이상희 위원이 반대하면서 직접 수정 문안을 작성해 제시했고 결국 두 문안 중 무엇을 선택할지가 전체위 의결사항으로 올라온 것이다.

김광동 위원장은 “사실관계의 한계를 지적하는 다양한 표현과 형식이 있을텐데 이걸 건건마다 논의해야 하느냐”며 피로감을 표했다. 이상희 위원은 얼굴을 붉히며 강력히 반발했다. “(부역사실) 확인은 무슨 확인입니까? 우리가 부역조사하는 기관입니까? 우리가 부역사실 조사 시도를 했습니까?”

조사4과가 작성한 문안은 문장구조상 ‘진실화해위의 한계’를 표현한 문장이다. 그게 아니라면 주술관계가 어긋난 비문이다. 결정적으로는 진실화해위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문장이다. “부역사실을 확인하려 했는데 못 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 기본법(과거사법) 제1조 목적은 “항일독립운동,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에 의한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라고 규정한다. 그 어디에도 진실규명 대상자의 부역행위를 조사한다는 조항은 없다. 진실화해위는 부역행위 여부를 조사하는 기관이 아니다. 이상희 위원은 “조사의 한계가 아니라 자료의 한계로 써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김광동 위원장은 “조사의 한계와 자료의 한계가 동일한 말 같다”고 했다.

야당 추천 이상훈 상임위원은 “1기 진실화해위에서 태안 사건 진실규명 받은 분들이 배상소송할 때 법원에서도 신원기록심사보고서를 못 믿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한계가 있는 주석을 달면서까지 굳이 왜 보고서에 넣으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당 추천 이옥남 상임위원은 “(신원기록심사보고서에 나온) 부역혐의에 대해서는 신뢰성이 없고, 희생 사실만 신뢰성이 있냐. 왜 특정 부분만 받아들이냐”고 말했다.

이번 진실규명 보고서에 인용된 1980년 서산경찰서의 ‘신원기록심사보고’는 ‘심사기준표’에 따라 대상자들을 갑종·을종·병종으로 나눈 뒤, 각각 1-7(악질 부역등에 가담 사살 또는 처형된 자), 2-10(부역 후 월북), 3-8(부역 사실 불확실) 등의 코드로 분류했다. 명단에 기록된 2499명 중 1-7이 1473명으로 가장 많다. 대상자 중 무려 59%에 이르는 1473명이 악질부역자로 판정돼 재판 없이 사살 또는 처형했다는 뜻인데, ‘악질 부역’ 등과 관련해 뒷받침할 만한 설명이나 근거는 전혀 없다.

결국 61차 전체위에서 마지막으로 타협을 본 주석 문안은 이러했다.

“신원기록심사 보고서는 진실 규명 대상자의 희생 시기 및 희생 이유를 규명하는 데 다소 한계가 있다.”

다소 한계가 있는 게 아니라, 앞서 밝힌 것처럼 전혀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근거가 없는 부역 등급을 주석을 달아서라도 넣어야 하는 이유가 김광동 위원장에게는 있어 보인다. 지난 5월25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부역 혐의 희생자 중 부역자를 세심하게 살피겠다”는 말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폭력으로 인생이 파괴된 희생자들에게 어떻게든 부역의 굴레를 씌우는 게 ‘진실화해위 위원장 김광동’의 정체성처럼 보인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는 8월부터 4만여명의 시민을 영장없이 체포해 전국의 군부대에 설치된 삼청교육대에 수용한다. 사회 전체에 최고조의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9월1일부터는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로부터 전국 각 경찰서에 ‘신원기록일제정비계획’ 지침이 하달된다. 내란을 일으킨 헌정 파괴세력이 전 국민을 물샐틈없이 통제하기 위해 ‘신원이상자’로 분류돼 온 사람들의 사찰 기록을 최종 정비하려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서산경찰서의 ’신원기록심사보고’가 43년 뒤 과거의 인권유린 사건을 규명하려 설립된 국가기관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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