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열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제60차 전체위원회에서 김광동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이날 ‘충남 태안 이원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진실규명 보고서에 부역혐의에 대한 등급을 기재하는 문제를 놓고 여야 추천 위원들은 설전을 벌였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한국전쟁기 부역혐의 희생자 진실규명 보고서의 희생자 명단에 “악질 부역”등 부역 혐의에 관한 등급을 처음 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가 신뢰하기 어려운 과거 경찰 기록물을 인용해 공식 문서에 ‘부역자’라는 낙인을 찍자, 유족들은 “희생자를 두번 죽이는 부관참시”라고 반발했다.
20일 진실화해위가 지난 18일 열린 60차 전체위원회에서 의결한 ‘충남 태안 이원면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진실규명 결정 보고서를 보면, 희생자에 대한 ‘부역 혐의 등급’ 표시가 돼있다. 진실화해위 1기(2005~2010년)와 2020년 12월 출범한 2기를 통틀어 희생자의 부역 혐의 등급을 보고서에 표기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김광동 위원장이 지난 5월25일 기자간담회에서 “부역 혐의 희생자 중 부역자를 세심하게 살피겠다”고 밝힌 것을 실천으로 옮긴 셈이다.
진실화해위 조사4과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이 사건은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충남 태안 이원면에 거주하던 주민 35명이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 혐의로 경찰 등에 의해 희생된 일이다.
진실화해위는 2008년 입수한 서산경찰서의 ‘신원기록 심사보고’에 적힌 심사기준표를 그대로 인용해 진실규명 대상자 35명 중 17명의 희생자 이름 옆에 ‘악질 부역 등에 가담 사살 또는 처형된 자’에 해당하는 코드명 ‘1-7’을 기재했다. 1914~1989년 태안은 행정구역상 서산군 태안읍으로, 서산경찰서 관할이었다.
‘신원기록 심사보고’는 1980년 9월 한 달간 전국 경찰서에서 실시된 ‘신원기록 일제정비’의 결과물이다. 내무부 치안국 지침에 따라 6·25 부역자 및 자수자, 처형자 등의 문서와 대공상 위험이 있다고 분류한 사람들에 대한 명부를 한권으로 작성한 것이다. 서산경찰서는 여기에 기재된 사람들을 ‘심사기준표’에 따라 갑종·을종·병종으로 나눴고, 각각 1-7(악질 부역), 2-10(부역 후 월북), 3-8(부역 사실 불확실) 등의 코드로 분류했다. 명단에 기록된 2499명 중 1-7이 1473명으로 가장 많다.
2008년에 이 기록을 입수했던 최태육 전 조사관은 한겨레에 “심사보고의 1-7 ‘악질 부역’이라는 내용 자체가 1950년 9월에 마련된 부역자 처리기준에는 아예 없다”며 “1980년 만들어진 1-7은 경찰, 보안사, 중앙정보부가 연좌제를 적용해 부역 혐의 희생자를 통제하기 위한 용도로 만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7을 ‘희생 여부’ 확인 외에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무리한 추정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심사보고엔 ‘악질 부역’ 등과 관련해 뒷받침할 만한 설명이나 근거가 전혀 없다.
이에 이날 전체위원회에서도 여야 추천 위원간 등급 표시 여부를 두고 이견이 있었지만, 결국 위원회는 “등급 표시는 사실관계 입증에 한계가 있다”는 내용을 주석에 보충하기로 하고 해당 사건 진실규명을 의결했다.
한국전쟁 당시 태안치안대에 의해 가족 4명을 잃은 정석희 태안유족회장은 한겨레에 “부역자 등급 표시를 할 거면 진실규명은 안 하는 게 낫다. 희생자를 두번 죽이는 부관참시”라고 말했다. 정 회장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여놓고 지금 와서 악질 부역자라니, 책임을 죽은 사람에게 돌리면서 모욕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1기 진실화해위에선 ‘전남 진도 부역 혐의 희생사건’의 경우에도 당시 진도경찰서의 사살자 및 동 가족동향 명부인 ‘대공’을 희생자 확인에 활용했는데, 2기 진실화해위에선 이 자료의 사살개요 항목에 적힌 ‘암살대원’ ‘분주소 총무책’ ‘견자위대원’등을 진실규명 보고서에 표기하자고 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서산경찰서가 1980년 정리한 ‘신원기록 심사보고’ 표지. 진실화해위 제공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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